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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증 上


박무현은 침대에서 떨어진 충격에 잠에서 깼다.

“…….”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의문이었다. 해저기지를 나온 뒤 박무현이 침대에서 자는 일 따윈 없었으니까.

그런데, 왜?

깜짝 놀란 가슴이 수축하며 뻐근한 통증을 일으켰다. 숨이 막혀 소리도 지를 수가 없었다. 박무현은 정신없이 눈을 깜박이며 주위를 살폈다. 낯선 듯 익숙한 풍경이 천천히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바닥에 엎어진 자세 그대로 꼼짝도 하지 못했다. 믿기지 않는 현실에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 거 같다. 가위에 눌린 걸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악몽을 꾸는 중이고 가위에 눌린 거라고 믿고 싶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이곳은 해저기지 백호동에 있던 자신의 숙소처럼 보였으니.

꿈이다. 정말 기분 나쁜 꿈을 꾸고 있는 거다. 박무현은 도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뺨에 닿는 차가운 바닥의 냉기만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흐…….”

꽉 맞물린 잇새에서 앓는 소리가 새 나왔다. 박무현이 천천히 눈을 뜨고 뿌예진 시야를 손으로 문질러 닦았다. 뜨뜻한 눈물이 줄줄 흘렀다. 모든 감각이 생생했다. 꿈일 수가 없을 정도로.

‘말도 안 돼.’

박무현은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밀려오는 절망감에 머리를 붙들며 참았던 비명을 내질렀다. 그럴 리가 없어. 이건 다 꿈일 거야. 새빨갛게 붉어진 눈시울이 현실을 부정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침대 옆에 놓여 있는 가족사진을 보자 코끝이 더 매워졌다.

박무현은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닦으며 가방을 먼저 찾았다. 모든 게 꿈일 거라고 믿으면서도 거침없이 가족사진과 주변에 보이는 물건을 그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었다. 이미 한 번 나가봤잖아. 또 할 수 있을 거야. 괜찮아.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이 루프를 끝내는 거야. 할 수 있어. 자기세뇌 수준으로 강박적인 혼잣말이었다.

수건과 마른 옷가지, 물 한 병과 상비약을 챙기고 핸드폰과 패드 역시 챙겼다. 마지막으로 버릇처럼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패드 화면을 켜는 순간, 박무현은 그대로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오전 10시 37분.

“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엉망으로 일그러져있던 얼굴이 짐짓 놀라 굳었다. 일순간 모든 생각이 툭 끊겨나가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

박무현은 액정 화면을 한참 동안 쳐다봤다. 축축했던 눈가가 어느새 버석하게 말라가고 있었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숙소 문을 열자 발치로 쏟아져 들어와야 할 물줄기가 없었다. 뼈가 시리도록 차가운 바닷물이 느껴지지 않았다. 복도로 나온 박무현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주위를 연신 두리번거렸다.

‘어떻게 된 거지?’

귀가 찢어질 거 같던 알람도, 숨통을 옥죄던 바닷물도 없는 백호동의 숙소는 적당히 소란스러웠으며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롭기만 했다.


* * *


숙소 복도를 한 바퀴 둘러본 박무현은 계단을 올라 탈출정 포트로 향했다. 사출된 탈출정은 없었다. 포트 안에 모여 있는 사람도 없었다. 다시 복도로 나온 박무현은 무언가에 홀린 듯 중앙동으로 향했다. 항상 같은 자리에 있던 시신이 보이지 않았다. 케빈 윌슨은 죽지 않았다.

중앙동에 다다른 박무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백호동에 있는 작은 원형 창문으로 내다봤을 때 심해 속의 등대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주작동의 연구센터를 보았었다. 연구센터는 붕괴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박무현은 불안을 떨쳐내지 못했다. 모두가 무사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그의 손끝은 차갑게 식어갔다.

중앙동에서는 반가운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엔지니어 슈트가 아닌 일상복을 입고 있는 정상현은, 박무현의 마지막 기억보다 훨씬 날씬했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잔뜩 인상을 쓰며 욕을 중얼거리는 정상현의 치아는 파손된 곳 없이 멀쩡해 보였다.

‘쟤가 여기 있으면 안 되는데…….’

백호동 쪽으로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을 멍하니 눈으로 좇던 박무현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또 다른 익숙한 얼굴들이 있었다. 엔지니어 다팀이었다. 니키타와 블라디미르 옆에 서 있는 남자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아니, 처음 본 줄 알았는데 살아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낯설게 느껴지는 거라는 걸 박무현은 뒤늦게 알았다. 드미트리다. 니키타와 정겹게 떠들고 있는 남자는 드미트리였다. 니키타와 닮은 듯 닮지 않은 얼굴에 짧은 금발 머리. 살아있는 드미트리였다.

박무현은 속으로 안도했다. 드미트리가 살아있다는 건 이리나도 살아있다는 걸 테니까. 이리나의 눈을 감겨주던 감각이 손바닥을 간지럽혀 박무현은 주먹을 말아쥐었다. 뒤이어 나타난 니콜라이를 보고는 속이 울렁거려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마침 중앙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고 있었다. 박무현은 그 앞에 서서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렸다. 남들만큼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4분 남짓한 시간이 지나고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인사를 하거나 아는 체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거 같은데, 박무현은 그들에게 뭐라 했는지, 제대로 인사를 나누긴 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머리가 어지럽고 멍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자 멀지 않은 곳에서 작게 수군덕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곳을 힐끔 쳐다보자 놀랍게도 엔지니어 마팀 사람들이 있었다. 박무현이 제대로 알아본 얼굴은 제니퍼 하나였다. 하필 중앙 엘리베이터를 제니퍼와 같이 타게 되다니. 박무현은 그쪽을 못 본 척하며 눈을 돌렸다. 대신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언뜻 헨리 이름이 들리기도 한 거 같았다.

박무현은 눈썹을 휘며 입술을 꾹 물었다. 죽지 않은 케빈이 80번 방에서 헨리를 발견한 모양이다. 다행…인가? 혼란스러운 머리통이 아래로 푹 꺾였다. 벽에 기대어 선 박무현이 두 손을 꽉 맞잡았다. 어느새 손바닥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멈추지 않고 올라갔다. 정전이 나거나 중간에 멈추는 일은 없었다. 착실히 지상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보며 박무현은 점점 숨이 차는 것을 느꼈다. 홀로 냉장실에 갇혀있기라도 한 것처럼 숨이 가쁘고 오금이 저렸다. 그런 박무현을 이상하게 여기며 힐끗대는 시선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해명할 정신머리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박무현은 바싹 말라가는 입술을 혀로 훑으며 밭은 숨만 몰아쉴 뿐이었다.

띵- 마침내 엘리베이터가 대한도에 도착하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0층에 다다르지 못하고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일 따윈 일어나지 않았다. 그제야 희게 질린 손끝에 뜨뜻한 피가 돌았다. 박무현은 주먹을 말아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하며 가장 늦게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

“아…….”

아무 문제 없이, 그는 너무도 손쉽게 대한도의 땅을 밟았다. 허무하리만치 쉬운 탈출이었다. 손가락이 잘리지 않았으며 총을 맞거나 계단을 오르느라 진땀을 빼지도 않았다. 정말로 순식간에 지상까지 다다랐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폐에 가득 들어오는 공기가 뜨겁고 따뜻했다. 날씨가 워낙 좋아 구름도 보이지 않을 만큼 쾌청한 날씨였다. 박무현은 정수리를 내리쬐는 뜨거운 햇볕을 만끽하며 대한도의 바다로 향했다. 해변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전부 꿈이었다고?”

박무현이 반쯤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한도가 이토록 평화로운데 사이비종교의 테러라니. 말도 안 된다. 아니, 말도 안 되는 건 평화롭고 한적한 이 해변에 줄지어 있던 시체들의 모습을 생생히 떠올리는 자신의 기억이었다. 하지만 그게 꿈일 리가 없다. 꿈이었으면 진작 깼어야지. 개고생하며 간신히 한국으로 돌아가 겨우 일상을 되찾아가고 있었는데 전부 꿈이었습니다 하고 깨어난다고? 웃기지 말라 그래.

턱에 힘이 들어가자 빠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꿈일 수가 없었던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이상한 점은 대한도가 왜 이렇게 멀쩡하냐는 거다. 어째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걸까. 박무현은 어금니를 질끈 물고 있던 턱에 힘을 풀며 핸드폰을 꺼내 다시 한번 날짜를 확인했다. 오늘은 5월 31일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대한도는 평화롭기만 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해저기지는 이제 안전한 걸까? 이대로 해저기지에서 발 뻗고 지내면 되는 건가? 하지만 무한교 신도들은 이미 해저기지에 잠입해있던 거 아니었나.

박무현의 얼굴이 불안과 혼란으로 일그러졌다. 어쩌면 일어나야 할 일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불안정한 유예기간 속에 떨어진 걸지도 모른다. 한 마디로 해저기지는 지금 불발탄과도 다름없는 상태라는 거였다. 사건이 터져야 할 시간에 터지지 않았고, 언제 그 끔찍한 일이 터질지 알 수 없는 채 현재 상황을 유지하고만 있는……. 그게 정말 안전하다고 할 수 있을까?

연구센터에 어뢰가 날아들지 않은 건 천만다행인 일이었지만, 박무현은 도저히 대한도 아래로 다시 내려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엔지니어 나팀과 라팀은 이미 총기를 반입했을 거다. 저 바다 아래에는 언제 해저기지를 테러할지 모르는 사이비 집단이 곳곳에 포진해있다. 그리고 박무현은 그들이 누군지 이제는 안다. 기억해내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눈앞에 스쳐 지나가는 신도들의 얼굴에 구역질이 났다.

‘이제 어떡하지?’

또다시 루프를 반복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건이 바뀌었다. 주작동 연구센터는 어뢰의 폭격을 피해갔으며 무한교는 어찌 된 영문인지 해저기지를 공격하지 않았다. 만약 무한교가 테러 작전을 유예한 거라면, 박무현은 지금 어떻게 움직여야 좋을까. 신고를 하면 사람들이 믿어줄까? 도리어 박무현이 미친놈으로 몰릴 가능성이 더 컸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대한도를 나가야 한다. 계약서에 서명한 지 닷새밖에 안 됐는데 퇴사를 하겠다고 하면 무슨 소릴 들어먹게 될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어떤 불이익이 따를지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 그런 걸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무한교가 테러를 일으킬 테니 무조건 그 전에 도망쳐야 했다. 그런데 무한교가 아무 짓도 벌이지 않는다면? 사실은 무한교가 존재하지 않는 거라면? 멀쩡히 받을 수 있는 월급을 내팽개치고 빈손으로 돌아가게 되는 거라면?

“…….”

그렇다 한들 목숨을 걸 순 없었다. 만에 하나 단순히 테러 계획에 변동이 생긴 거라 해도 무한교는 그 미친 짓거리를 반드시 벌이고도 남을 놈들이었다. 그러니까 도망쳐야 한다. 그들의 미친 짓거리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 죽음을 되풀이하고 하루를 반복하던 그 끔찍한 경험은 한 번으로 족했다.

‘다른 사람도 데려갈 방법은 없나.’

박무현은 대한도의 해변에서 만났던 생존자들을 떠올렸다. 그들을 해저기지에 두고 혼자 달아날 생각을 하니 속이 울렁거렸다. 기껏 다들 대한도에서 벗어났는데 다시 해저기지에 처박혀야 한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윽.”

일순간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이 일었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쥔 박무현이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인중을 타고 뜨뜻한 핏물이 뚝뚝 흘렀다. 머리를 쥐고 있던 손으로 코와 입, 턱을 감싸 쥐었다. 순식간에 손을 적시는 핏물을 보자 안 그래도 어지러운 정신이 더 혼탁해졌다.

이상하다. 난 분명 집에 있었는데. 박무현이 무거워진 눈꺼풀을 느리게 끔벅였다. 잘린 손가락을 무사히 회복 중이었고 경과가 좋았다. 빠르면 다음 달에 의지를 찰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왜 머리로 내리쬐는 햇볕이 이렇게 뜨거운 건지 모르겠다. 병원 불빛이 원래 이렇게 뜨거웠나. 적외선 조사기로 찜질 중이었나? 눈을 뜨고 있는데도 캄캄한 시야 너머에서 철썩, 철썩, 평화로운 파도 소리가 들린다.

습기 가득한 바닷바람이 부는 여기는…….

“저기, 괜찮으세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박무현이 소리가 난 쪽을 쳐다봤다. 눈앞을 캄캄하게 덮고 있던 어둠이 시야의 중심에서부터 서서히 걷혀갔다. 박무현은 뒤늦게 자신이 다시금 대한도로 돌아와 있었음을 떠올렸다. 그의 앞에는 턱에 간신히 닿을 정도의 숏컷인 여성이 서 있었다. 아직 물기가 입 안는 진남색 엔지니어 슈트를 입은 여성이 박무현을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다.

이지현이었다. 실로 반가운 얼굴에 박무현은 멍하니 그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힘겹게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으신 거 맞아요? 안색이 안 좋으신데…….”

“어? 치과 선생님?”

이지현 뒤로 서지혁이 불쑥 나타났다.

“헉, 왜 피가…… 아니, 선생님 왜 울고 있어요?”

이지현 옆에 나란히 서 있던 서지혁이 박무현에게 성큼 다가와 멀쩡해 보이지 않는 그의 상태를 살폈다.

“누구한테 맞고 우는 거예요? 어떤 새끼지?”

“뭐? 누가 맞았다고?”

곳곳에서 엔지니어 가팀이 나타나고 있었다. 어디서 달려온 건지 박무현을 발견한 강수정이 ‘선생님? 이게 무슨 일이에요?’ 하며 기겁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백애영은 토끼 눈이 되어서 박무현을 빤히 쳐다봤다. 박무현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왜, 이 사람들이 여기에 있지? 다들 해저기지에서 나온 건 참 잘했다. 대한도까지 올라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니까 알아서들 나와준 건 정말 고마웠다. 문제는 얘네를 데리고 이제 어떻게 대한도에서 나가야 하지? 신해량이 숨겨놨다는 보트를 찾아봐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시끌벅적한 네 사람 뒤로 누군가가 또 다가오고 있었다.

빨갛게 염색한 머리의 남자를 반쯤 끌고 오다시피 하는 키가 크고 훤칠하게 생긴 검은 머리의 남자. 박무현은 속이 한층 더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시야가 보잘것없이 흔들렸다. 제발. 기껏 다 살려서 내보냈는데 왜 다시 여기에 모이고 있는 거야.

“여기서 다들 뭐 하고 있어.”

낮은 저음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박무현은 심장이 터질 것처럼 요동치는 걸 느꼈다. 신해량 옆에는 세상만사 다 귀찮아하는 눈빛의 김재희가 있었다. 시선을 사로잡는 연한 붉은색의 머리칼 아래로 피어싱이 빼곡한 귀가 보였다. 박무현은 그의 귓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김재희의 귀에 박혀있는 피어싱에는 익숙한 보석이 붙어 있었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김재희의 절실한 소원이 담겨 있을 그 보석이.

순간 김재희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태연하게 미소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고 박무현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김재희가 보석을 가지고 있다. 그 말인즉 무한교가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박무현의 허튼 망상 따위가 아니라 정말로 저 해저기지에 무한교 신도들이 들어와 있다는 거다.

“이번에 새로 오신 치과의사 선생님이 누구한테 맞았나 봅니다? 여기서 혼자 피 흘리면서 울고 계셔. 어떤 새낀지 바로 잡아서 족쳐야…….”

“어디를 다치신 겁니까.”

수다스럽게 떠드는 서지혁의 목소리 위로 무뚝뚝한 음성이 겹쳤다. 신해량이 박무현을 부르고 있었다.

“아, 우욱…….”

그러나 한계에 다다른 박무현은 신해량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견디기 힘든 토기에 몸을 돌리고 헛구역질을 해댔다. 옆얼굴로 쏟아지는 시선에 살가죽이 타들어 갈 것만 같았다.

차라리 이 모든 게 다 꿈이었으면 좋겠다. 


* * *


코피가 멎지 않아 꽤 오랫동안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박무현은 멀쩡했다. 아픈 곳도 없고 다친 곳도 없었다. 현기증이 조금 나는 것 말고는 이상이 없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박무현을 응급환자라도 되는 양 취급했다. 당장 대한도 병원으로 데려갈 기세였기에 박무현이 극구 사양하며 그들을 뜯어말렸다.

괜찮습니다, 멀쩡합니다, 방으로 가서 쉬고 싶습니다. 그 말만 기계처럼 반복했다. 병원 가기를 꺼리는 박무현을 이상하다고 생각한 신해량이 다른 팀원들을 먼저 돌려보내고 해변에 남았다. 그 옆에 서지혁도 같이 남아 멀어져가는 팀원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백애영은 다른 팀원들과 해저기지로 돌아가는가 싶더니 은근슬쩍 서지혁이 있는 곳으로 다가와 나머지 일행에게 어서 가라며 손짓했다. 강수정은 이쪽을 궁금해하는 눈치였으나 신해량의 명령에 마지못해 이지현과 김재희를 데리고서 해저기지로 돌아갔다.

그 뒷모습에서 박무현은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거기로 돌아가면 안 되는데. 내려가면 안 돼. 다시 못 올라올 수도 있다고. 정상현을 데려오려고 그러나?

박무현이 완전히 넋을 놓고 기지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 서지혁이 그의 얼굴 앞에다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선생님? 정신 차리세요?”

박무현의 시선이 해저기지로 돌아가는 팀원들에게서 서지혁에게로 느릿하게 옮겨갔다.

“자, 편하게 얘기하셔도 되니까 한번 말씀해 보세요.”

현실감이 없다. 이 모든 게 아직도 꿈만 같았다. 박무현은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서지혁을 쳐다봤다.

“대체 어떤 놈한테 맞았길래 이렇게 겁을 먹으셨을까? 어떤 새끼지?”

“저, 안 맞았습니다.”

“그래요? 그럼 누가 괴롭혔습니까?”

“괴롭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아직도 코피가 멎지 않아 얼굴이며 목, 옷과 손까지 피범벅이었다. 누가 보면 칼에 찔린 줄 알 거 같은 몰골이기는 했다. 뒤늦게 자신의 꼴을 확인한 박무현이 머쓱하게 피 묻은 손을 허리춤에 문질러 닦았다.

“그냥 코피가 가끔 납니다…….”

루프를 반복하다 보니 자연스러워져서 이상함을 느끼지도 못했다. 멎지 않은 코피를 하염없이 흘렸던 게…… 아마도 전시장에서부터였던 거 같다.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긴 했으나 그곳에서 함께했던 세 사람이, 지금은 멀쩡한 모습으로 제 앞에 서 있는 걸 보니 속에서 무언가 울컥 차올랐다.

서지혁의 머리를 집요하게 바라보던 시야가 흐릿하게 일렁거리자 박무현이 두 손으로 눈가를 비볐다. 손에 묻은 핏물 탓에 얼굴이 온통 피범벅이 되는지도 모르고.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됩니까.”

박무현이 충동적으로 말했다. 서지혁은 어서 얘기해보라며 선뜻 고개를 끄덕였고 신해량은 어디서 났는지 반쯤 물에 젖은 수건을 박무현에게 건넸다.

박무현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수건을 받아 얼굴을 대충 문질러 닦으며 물었다.

“제가 지금 사직서를 내면 언제쯤 대한도에서 나갈 수 있을까요?”

“네? 치과 문 연 지 며칠 안 되지 않았어요?”

생각지 못한 질문이었는지 서지혁이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표정이 흡사 바보 같았다. 신해량은 옆에서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가 끼어들었다.

“선생님.”

“예?”

“저희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신해량을 빤히 쳐다보자 그가 딱 한 마디를 덧붙였다.

“누구입니까.”

아. 박무현이 소리 없이 멍청하게 입만 벌렸다.

이미 저 세 사람은 박무현이 특정 인물에게 구타를 당했다고 확정 지은 모양이었다. 혹은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그 때문에 해저기지를 관두려 하는 거라고 여기는 걸까. 아닌데. 완전 헛다리 짚은 건데. 박무현이 해명할 새도 없이 서지혁이 해변의 모래를 발로 퍽 걷어차며 말했다.

“겁도 없는 새끼들. 사람 입에다 드릴을 꽂아 넣는 극악무도한 치과의사를 건드리다니! 선생님. 다음에 그 새끼들 만나면 치과로 부르세요. 거기서 우리 팀장이 앞니 몇 개 부숴 먹으면 선생님이 치료해주는 척 드릴로 생니를 쑤셔버리는 거 어떱니까? 마취도 하지 말고 그 미친 새끼들 이빨 다 빵꾸내 버리죠?”

터무니없는 소리에 박무현은 희게 질린 얼굴로 서지혁을 쳐다보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치과의사에게 환자의 이를 부숴 먹자고 제안하다니.

그 방법도 악랄하고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치과의사는 드릴로 생니에 구멍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농담하는 게 아니라 누가 괴롭히면 말씀하세요, 네? 우리의 든든한 신 팀장이 선생님을 지켜줄 겁니다.”

서지혁은 코피를 뚝뚝 흘리며 소리 없이 웃는 박무현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백애영은 그런 서지혁을 한심하단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서지혁의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때문인지 초조하게 울렁거리던 속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박무현은 입가에 웃음기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저는 괜찮습니다.”

“전혀 안 괜찮아 보이거든요?”

그러나 백애영에게 바로 핀잔을 듣고 말았다.

 

* * *


박무현은 조금만 더 해저기지에서 버텨보기로 했다. 어쩔 수 없었다. 기껏 대한도까지 올라가 놓고 제 발로 4해저기지에 돌아와 버렸기 때문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박무현의 의지는 아니었다.

그는 서지혁과 신해량에게 붙들려 4해저기지까지 내려왔다. 진심으로 이곳에 다시 오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박무현은 내려가기 싫다며 거부했다. 그러다 당장 대한도를 벗어나야 한다며 바다로 뛰어드는 바람에 반강제적으로 중앙 엘리베이터에 태워졌다.

박무현은 차분히 생각했다. 그래, 어차피 이들을 두고 혼자 도망갈 수는 없었다. 힘들긴 했지만 이미 경험해본 적 있는 일이었다. 두 번은 어렵지 않을 거다. 하나씩 오답을 제거하면서 아무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 그러면 모두가 다시 한번 해저기지를 탈출할 수 있을 거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동안 엘리베이터는 4해저기지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그 앞에 총구를 겨눈 괴한은 없었다. 박무현은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 모습을 신해량이 미심쩍어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박무현의 상태를 찬찬히 살피던 신해량이 넌지시 다가와 상담받아 볼 것을 권했다. 지나칠 정도로 불안해 보인다는 이유였다.

“괜찮습니다.”

박무현은 그 한마디로 일축했다.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도 코피가 멎지 않자 신해량은 박무현을 데리고 다시 병원으로 올라갈 기세였지만, 병원은 갈 수 없었다. 그곳은 이미 무한교에게 점령당해 아수라장이 되어있을 거다. 가봤자 제대로 된 진료를 받기 힘들 터. 신해량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박무현을 쳐다봤지만 억지로 엘리베이터에 태워 병원으로 올려보내는 무도한 짓을 범하진 않았다.

박무현은 방에 들어가 코피가 멎을 때까지 기다리며 해저기지의 현 상황에 대해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았다.

엔지니어 나팀과 라팀은 분명 총기를 반입했을 거다. 연구센터가 어뢰를 맞지 않았어도 총을 든 놈들이 무슨 짓을 벌일지는 모르는 일이다.

한편으로는 정말 그들이 총을 갖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뒤따랐다. 엔지니어 나팀과 라팀에게 총기가 주어진 건 그날이 무한교가 의식을 치르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제단을 준비하고 제물을 만들기 위해.

하지만 지금은 아무 소식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테러도 없었으며 정신 나간 의식을 행하기 위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즉, 무한교의 계획이 틀어졌으니 해저기지에는 총이 들어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 박무현의 우려와 달리 나팀과 라팀은 총으로 무장하지 않았을 수 있었으며 무한교에게서 계획을 전달받지 못한 채 평상시처럼 해저기지 생활을 영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박무현은 울 거 같은 얼굴로 아직도 피를 쏟고 있는 코를 틀어막았다. 제발 이 해저기지에 총 든 사람이 없기를. 그래야 조금이나마 숨을 쉴 수 있을 거 같았다. 아니라면, 박무현은 피가 바싹 말라 4해저기지에서 미라로 발견되고 말 거다.

코피는 머지않아 그쳤다. 박무현은 피범벅이 된 옷을 갈아입고 손과 얼굴을 대충 휴지로 닦았다. 말라붙은 핏자국은 물을 조금씩 묻혀 말끔히 지워냈다.

뒤늦게 느껴지는 허기에 박무현은 한숨을 쉬고 방을 나왔다. 3해저기지까지 빵을 사러 갈 여력은 없었다. 중앙동에 있는 식당을 들를 참이었다.

4해저기지에는 이미 박무현에 관한 이야기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다. 새로 온 치과의사가 누구에게 처맞고 피범벅이 돼서 돌아왔다더라.

옷을 갈아입고 핏자국도 다 씻었는데도 자신을 힐끔거리는 시선에 박무현은 목덜미가 화끈거렸다. 창피해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선생님!”

3해저기지를 다녀온 건지 중앙 엘리베이터 쪽에서 나타난 유금이가 박무현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그 품에는 커다란 빵 봉지가 안겨있었다.

“얘기 들었어요. 괜찮으세요?”

“아……. 그거 헛소문입니다. 전 괜찮아요.”

“정말요? 피가 많이 나셨다던데요?”

“피곤하면 종종 코피가 나는데, 조금…… 많이 나서 그렇습니다.”

유금이는 빵 하나를 박무현에게 건네며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한 눈빛을 지었다. 박무현은 그가 건넨 빵을 받으며 미소만 지었다.

운이 좋았던 건지 주작동 쪽에서 오는 김가영도 발견할 수 있었다. 반가운 얼굴에 박무현은 무의식적으로 그를 아는 체할뻔했다. 어설프게 들어 올렸던 손을 황급히 거두고 유금이와 인사하는 김가영을 쳐다봤다.

“가영 언니. 여기는 이번에 새로 오신 치과 선생님.”

유금이가 먼저 김가영을 소개해 주었다.

박무현은 꾸벅 인사하며 말했다.

“박무현이라고 합니다.”

“김가영입니다. 혹시 빵 좋아하세요?”

“예. 좋아합니다.”

김가영은 잘됐다며 유금이에게 주고 남은 빵과 쿠키 일부를 박무현에게도 선뜻 나눠주었다. 그런데도 아직 김가영 손에는 빵이 한가득 남아 있었다.

김가영은 그것들을 마저 처리해야겠다며 중앙동을 이리저리 바삐 돌아다녔다. 주작동 77호에 갇힌 김가영이 아니라 중앙동에서 빵을 나눠주고 있는 김가영은 처음 보는 모습이라 박무현은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봤다.

낯설고 신기한 기분이었다. 해저기지가 원래 이토록 평화로운 곳이었나?

박무현은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던 계획을 바꿨다. 유금이와 김가영이 나눠준 빵으로 한 끼 식사는 충분히 때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방으로 돌아가려던 박무현을 유금이가 불러세웠다. 그리고 빵을 다 뿌리고 돌아온 김가영과 함께 셋이서 [붉은 산호]로 갔다.

세 사람은 카페 앞 테이블에 앉아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졌다. 주된 이야기는 ‘박무현이 누구에게 맞았는가’였다. 박무현은 맞은 게 아니라고 그냥 코피가 난 것이라며 해명했지만 두 사람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엔지니어 가팀 팀장이 움직였다는 이유 하나로.

아무리 그래도 자신이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사람은 아닌데. 박무현은 억울했다. 아무한테도 안 맞았다고.

어쨌든 유금이와 김가영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지니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하루 같았다.

무한교의 테러는 일어나지 않았으며 해저기지는 안전하다. 한쪽만 일방적인 친밀감을 가진 관계이긴 해도 반가운 이들과 보낸 시간이 싫지 않았다. 그 순간만큼은 여기가 해저기지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정도였다.

하지만 숙소로 돌아가 침대에 눕는 순간. 박무현은 좀처럼 잠들 수가 없었다. 불면증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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