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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증 下


벌써 며칠 째더라. 박무현은 매일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캄캄하고 조용한 방으로 점점 물이 차오르는 소리가 들려서 눈을 떴다. 당연하게도 바닥에는 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해저기지는 멀쩡했으며 숙소는 안전하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던 박무현은 이불과 베개를 끌어안고 바닥으로 내려왔다. 바닥에 누워 한참 동안 자세를 바꿔가며 잠을 청해보려 했지만 잠들 수가 없었다.

불 꺼진 방 안에서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던 박무현은 숨이 막혀 불을 켜고 일어나 헐떡였다. 하는 수 없이 물을 마시고 복도로 나가 서성였다. 바닷물이 차지 않는 조용한 백호동 숙소의 복도. 이제는 낯설기까지 한 그 광경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정처 없이 서성였다. 그리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불을 켠 채 바닥에 누워 눈을 감았다.

잠시 뒤. 박무현은 다시 복도를 배회하고 있었다. 수면에 실패한 탓이었다. 그는 계단을 오르내리며 백호동 복도의 창문을 통해 연구센터가 무사한지 살폈다. 4해저기지엔 어떤 재난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백호동 숙소 복도를 나돌아다녔는지 모르겠다. 슬슬 몸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면 잠들 수 있을 거 같단 예감에 즉시 방으로 돌아갔다.

다시 한번 바닥에 누운 박무현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불은 끌 수가 없었다. 이 작은 방 안이 빛 한 점 없이 캄캄해지면 그대로 바닷물에 잠겨버릴 것만 같았다.

머잖아 사람들이 하나둘씩 잠에서 깨어 하루를 시작하는 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렸다. 박무현은 그제야 간신히 잠을 청할 수 있었고 정확히 20분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주 짧은 휴식이었다.

그의 불안은 쉬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4해저기지에는 사람이 많았다. 어딜 가도 사람이 있었다. 개중에는 무한교 신도들도 섞여 있었다.

박무현은 자신이 언제부터 이렇게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었는지 속으로 감탄했다. 알아보고 싶지 않아도 해저기지 내의 무한교 신도들이 계속 눈에 들어왔고, 저들이 어느 날 갑자기 미쳐서는 과거로 돌아가겠다며 총을 들고 사람을 쏴죽일 것만 같았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신도들이 총을 가지고 있지 않은 듯하다는 거다. 일전에 추측한 대로 무한교는 신도들에게 총을 지급하지 않았을 확률이 높아졌다.

그러나 이미 박무현은 그들이 총을 들고 다니는 모습이 더욱 익숙해져 있었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모든 감각이 곤두서서 그들을 경계했다. 혹시 모르는 거니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모든 사고는 어뢰 폭격으로부터 시작됐다. 박무현은 언제 연구센터가 공격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주작동의 연구센터가 무너지면 무한교는 총을 메고 해저기지를 점령하여 사람들을 공격할 거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어뢰를 맞고 주작동 연구센터가 날아갈까 봐 박무현은 하루에도 몇 번씩 연구센터의 불빛이 꺼지진 않았는지 살폈다. 아침, 낮, 밤, 새벽 가리지 않고.

오늘도 어김없이 박무현은 모두가 잠든 조용한 해저기지를 거닐었다. 언젠가 이 거대한 해저기지에 자신만 혼자 남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4층짜리 초호화 해저 리조트를 가진 북태평양 재벌이 될지도 모른다면서. 마치 용궁을 가진 용왕처럼…….

새벽 4시. 박무현은 졸리지만 잠들지 못하는 뻐근한 눈을 비볐다. 붉게 충혈된 눈이 백호동 복도에 나 있는 원형 창문 밖을 쳐다봤다. 유금이가 말했던 대로 연구센터의 불은 어느 때에도 꺼지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영원할 것처럼 어두운 바다를 밝히고 있었다.

박무현은 심해 속의 등대를 멍하니 바라봤다. 해저기지 내부 온도는 서늘한 정도로 유지가 되는데 연구센터의 불빛을 멍하니 보고 있으니 어쩐지 따뜻한 기분이 들었다.

“무현 씨.”

어슴푸레한 복도에서 박무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언제 이렇게 가까이 온 건지 그의 바로 옆에 신해량이 서 있었다.

박무현은 놀라지도 않고 천천히 눈을 굴려 불청객을 바라봤다. 조용하고 좋았는데. 얘는 왜 여기 있지. 불면증은 다 완치되었다고 하지 않았나.

“해량 씨. 안 주무십니까?”

“자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렇군. 다행이다. 사람은 잠을 잘 자야 한다. 박무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자그마한 창에 달라붙었다. 그곳이 유일한 탈출구라도 되는 양.

꽤 간절한 모습으로 연구센터의 불빛을 바라보고 있자 신해량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물었다.

“주무시지 못하는 겁니까.”

“……예.”

“해저기지 생활이 힘들어 보입니다.”

“실제로 힘듭니다.”

죽을 거 같다. 아니다. 생각보다 버틸 만하다. 정상현을 제외하면 엔지니어 가팀 사람들은 박무현을 만날 때마다 반갑게 아는 척을 해왔다. 박무현의 상태를 언뜻 살피는 거 같았다.

다들 그때 그놈은 어떻게 되었느냐며 꼭 한 번씩 물었다. 정말 치과로 데려가서 서지혁과 같이 해치웠냐는 질문을 들었을 땐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던 거 같다.

김재희는 전처럼 구원자니 친구니 하며 친근하게 굴지는 않았지만, 박무현을 모른 척하지도 않았다. 몸은 괜찮으냐며 인사하길래 박무현이 웃으며 대답했다. ‘멀쩡합니다.’ 그러자 김재희는 호기심 가득한 눈을 빛내며 박무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래서, 누구한테 맞으신 거예요?’하고. 맞은 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했지만 아무도 들어먹질 않았다. 김재희까지 박무현이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거라고 확정 지은 모양이었다.

억울하긴 했지만 불쾌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재미있었다. 나쁘지 않았다. 전과 완전히 달라진 이 생활이 박무현은 퍽 즐거웠다. 어쩌면 이번이야말로 진짜 삶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었다.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얼마 전에는 짧았던 휴일을 보내고 출근하기 위해 딥 블루에 갔다가 기절할 뻔한 적도 있었다. 아니, 정말로 기절했다. 그 안에서 벌어졌던 끔찍한 순간들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진 탓에.

입을 떡 벌리고 있는 백상아리의 머리뼈가 어찌나 무섭던지 모른다. 박무현은 일터에 들어가기 위해 십여 분 넘게 저 자신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다행히 예약 환자가 오기 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의식을 차렸다는 소리였다.

어지러운 머리를 붙들고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딥 블루 입구 옆에 쓰러져 있었음을 깨달았다. 시간은 3분 남짓 지나 있었다. 3분짜리 쪽잠이었다.

정신을 덜 깨서 그런지 뇌에 흐릿한 막이 덧씌워진 듯 몽롱했다. 제정신이라고 하긴 힘들었으나 박무현은 그 덕에 치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조금이라도 잠을 자서 그런 건지, 아니면 잠이 덜 깨서 그런 건지, 그도 아니면 여전히 잠이 부족해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어찌 됐든 끔찍한 기억은 잠시나마 흐릿해졌고 덩달아 불안도 가라앉았다.

잠을 설친 것치고 진료를 보고 치료를 하는 데에 지장이 없었다. 실수할까 봐 걱정했던 게 무색할 정도였다. 단지 똑바로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환자 없이 텅 빈 진료실을 볼 때마다 유니트 체어에 피 흘리며 누워 있던 백애영이 떠올라서.

그뿐만이 아니었다. 무한교 사람이 치료를 받기 위해 찾아오면 속에서 울컥울컥 치솟는 정체 모를 감정을 억누르느라 박무현은 어지간히 애를 먹었다. 저들이 사실은 박무현에 대해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하는 건 아닐까 하는 밑도 끝도 없는 의심까지 피어올랐었다.

“절 괴롭힌다는 사람은 찾으셨습니까?”

불이 꺼져 평소보다 어둑한 복도에는 두 사람의 고른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박무현은 창문에서 눈을 떼고 신해량을 힐끗 올려다봤다. 신해량은 말없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박무현은 그럴 줄 알았다며 신해량을 따라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저를 괴롭히는 건 이 해저기지 같습니다.”

박무현이 눈을 들어 캄캄한 복도를 훑어보았다. 눈동자가 굴러가며 드러나는 흰자위가 보기 흉할 만큼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를 발견한 신해량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선생님. 상추를 드셔보십시오.”

뜬금없는 말에 박무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신해량을 쳐다봤다.

“상추요?”

“불면증에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가요.”

“예.”

그때부터 신해량은 불면증 치료 방법을 이야기했다.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수면 효과가 있다는 차를 마시거나, 베개나 이불을 바꿔보거나, 방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거나. 혹은 책을 읽어보거나 지루한 영상을 틀어놓는 것도 방법이 된다나. 생각보다 신해량에게선 여러 가지 방안이 쏟아져나왔다.

박무현은 조금 놀란 눈으로 신해량을 바라봤다.

하긴. 그 정도 돈을 쓸 만큼 불면증에 시달렸던 거라면 안 해본 방법이 없긴 하겠다. 해저기지 내에 신해량 만큼 불면증에 도가 튼 사람이 있겠나. 신해량은 무려 불면증을 고치겠다고 6억을 쓴 인간이었다.

“참고할게요. 고맙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말씀하십시오.”

“예. 그럴게요.”

박무현이 가볍게 묵례하며 인사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신해량과 동행하는 대신 복도에 남아 다시 창밖을 구경했다. 심해에서 저렇게 빛을 내는 건 심해 생물들에게 공해가 되지 않는 건가 따위의 생각을 하면서.

부질없는 생각의 흐름은 커다란 손에 어깨가 붙잡히면서 끝이 났다.

“같이 들어가시죠.”

숙소로 가는 줄 알았던 신해량이 돌아와 박무현을 붙든 것이었다.

“방에 가봤자 잠도 못 잡니다.”

“읽을 만한 책을 드리겠습니다.”

“…….”

“주무셔야 합니다.”

뒤따르는 재촉에 박무현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책을 읽기엔 눈이 뻐근했다. 하지만 뭐라도 읽으면 정말 잠이 올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박무현은 내심 기대를 걸어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필요한 말 없이 두 사람은 그저 숙소를 향해 걸었다. 미묘하게 어긋나는 발소리가 터벅터벅 복도에 울렸다.

적막한 순간이었다.


* * *


박무현의 불면증은 나아지지 않았다. 신해량의 조언을 따라 온갖 방법을 다 써봤으나 별 소득이 없었다. 슬슬 업무에도 지장을 받는 중이었다. 아직까지 환자를 보다가 조는 일은 없었지만 이대로 가다간 정말 큰 사고를 칠 거 같았다. 어느 모로 봐도 박무현은 현재 치과 진료를 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병가를 내십시오.”

자신의 불면증이 위험 수준에 다다랐다는 것을 판단한 박무현이 신해량에게 찾아가 의견을 물으니 명확한 답변이 돌아왔다. 병가를 내라.

“치과의사가 병가를 낼 수 있나요?”

“선생님의 현재 상태를 보면 쉴 것을 권고할 겁니다. 안된다 하더라도 가능하게끔 도와드리겠습니다.”

그거참 든든한 말이었다.

신해량은 조금 전 외벽 수리 작업을 하고 왔는데도 힘들어하는 기색 하나 없었다. 오히려 박무현을 보자마자 잠은 잤냐며 먼저 안부를 물었다. 박무현은 매가리 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고 신해량이 수면에 효과가 있다는 차를 권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중앙 휴게실에서 티타임을 가지게 되었다.

“이걸 마신다고 잠을 잘 수 있을까요?”

박무현이 받은 건 캐모마일 차였다. 카페에서 주문한 것이 아니라 무려 신해량이 가져온 거였다. 이런 게 어디서 났냐고 물으니 상비약처럼 가지고 있는 거라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해댔다.

“뭐든 안 해보는 것보단 낫습니다. 선생님께 맞는 방법을 찾아가는 거지요.”

박무현이 차를 홀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효과를 볼 수 있다면 좋겠다. 큰 기대는 되지 않았다.

박무현과 달리 신해량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지는 불면증 다 나았다고 커피를 마시는 건가. 자기도 모르게 떠오르는 삐뚜름한 심보에 박무현은 조금 놀랐다. 스스로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속으로 자조하며 신해량을 먼저 돌려보내려 했는데.

“차는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그러니 해량 씨는 할 일 하러 가셔도 됩니다.”

“지금 하고 있습니다.”

“예?”

영문 모를 소리를 하고 신해량은 입을 굳게 닫았다. 그리고 박무현이 차를 마시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부담스러운 시선은 신해량에게서만 오는 게 아니었다. 사방에서 이쪽을 흘겨보는 시선이 상당했다. 백애영과 커피를 마실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시선들이었다.

개중에는 몇몇 신해량에게 대놓고 시비를 걸며 다가오는 이들도 있었다. 당장이라도 신해량과 주먹다짐을 할 거처럼 살벌하게 으르렁거리더니 맞은 편에 앉아있는 박무현을 보고는 ‘새로 오신 치과의사 선생님이시죠? 다쳤다는 곳은 괜찮으세요?’ 하며 살갑게 미소 지었다. 그 간극이 소름 끼치면서 새삼 놀라웠다. 해저기지는 정말 신기한 세상이었다.

신해량은 손짓 몇 번으로 상대를 돌려보냈고 싸움은 벌어지지 않았다. 정말 다행이었다. 박무현은 놀란 가슴을 남몰래 조용히 쓸어내리며 마저 차를 마셨다.

신해량과의 대화는 의외로 매끄럽게 흘러갔다.

그는 커피 대신 차나 따뜻한 우유를 마실 것을 권했다. 카페인 섭취를 절대 금하라고 덧붙였다. 불면증에 카페인은 최악이긴 하다. 박무현도 그 정도 상식은 있었다.

“몸을 쓰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운동인가요…….”

박무현이 노골적으로 싫은 내색을 보이자 신해량의 입에서 더욱 끔찍한 소리가 나왔다.

“제가 지도해드리겠습니다.”

“아뇨. 아니요. 괜찮습니다.”

박무현은 정신이 번쩍 들어 사양했다. 안 그래도 지난번에 해저기지를 탈출하고 나선 운동을 시작하긴 했다. 지금은 다시 허약한 몸으로 돌아왔지만.

퍽 억울한 부분이었다. 기껏 다져놓은 체력이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언제 또 계단을 오를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몸을 단련해서 나쁠 건 없었다. 몸이 고단하면 잠이 잘 올 수도 있다. 지루한 책이나 영상을 보고도 좀처럼 잠들지 못했으니 직접 육체를 혹사시키는 거다.

근력과 체력이 운동하기 전 상태로 돌아오긴 했어도 몸을 어떻게 쓰면 되는지에 대한 감각은 머리에 남아 있었다. 그러니 전보다는 수월하게 체력을 기를 수 있지 않을까. 박무현이 차를 마시며 조용히 혼자만의 운동 계획을 짜던 중이었다.

“아니면 원인을 찾아 해결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말없이 그를 지켜보던 신해량이 테이블 위로 깍지 낀 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원인을 찾아서 해결한다고요?”

“예. 선생님의 불면증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음.”

박무현이 피로에 찌든 눈으로 중앙동을 찬찬히 훑어봤다. 그가 잠을 자지 못하는 이유야 단순했다.

전부 이 해저기지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이비 테러리스트들 때문에.

박무현은 언제 주작동 연구센터가 폭파할지 몰라 매일 불안에 떨었고, 언제 갑자기 미친놈들이 총을 들고 설쳐댈지 몰라 항시 초조해했다. 혹여나 자다가 또다시 침대에서 떨어져 깨어날까 봐 두려웠으며 그렇게 깨어난 숙소로 바닷물이 새고 있을 것만 같아 잠드는 것이 무서웠다.

그 원인을 해결할 방법이라면…….

“저, 퇴사해야겠습니다.”

박무현이 찻잔에 담겨 있던 마지막 한 모금을 말끔히 비우며 말했다. 평소처럼 핼쑥한 낯짝이었지만 답을 찾은 박무현의 두 눈에는 전에 없던 활기가 감돌았다. 


* * *


퇴사 과정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신해량의 도움 덕분에 박무현은 퇴사 날짜를 받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감사의 뜻으로 박무현은 신해량에게 끼니를 한턱 사겠다고 했다. 당연히 신해량이 거절할 줄 알았기에 빵이나 몇 개 사다 줄 생각이었는데 신해량은 선뜻 박무현과의 겸상을 수락했다.

그러나 사실상 휴업 상태인 박무현과 달리 신해량을 해치울 일이 많아 좀처럼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 결국 박무현은 퇴사 당일이 되어서야 겨우 신해량과 밥 한 끼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잠은 좀 주무셨습니까.”

박무현은 오늘 해저기지를 나간다. 퇴사를 결심하고 실제로 퇴사를 하기까지 약 일주일이 걸렸다. 박무현에게는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긴 시간이었지만 객관적으로 따지면 속전속결로 퇴사 처리가 진행된 거나 다름없었다. 전부 신해량 덕이었다. 그 시간 동안 박무현이 두 다리 뻗고 편히 잘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아뇨. 해저기지를 나가야 잘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박무현은 대한도를 떠나는 오늘까지도 잠을 설쳤다.

제대로 잠을 잤던 게 언제였더라. 기억도 안 난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오늘 해저기지를 나가게 되면 박무현은 원 없이 잘 수 있게 될 테니까.

단지 이번 주에 퇴사하는 거로 알고 있는 서지혁이 박무현과 함께 대한도를 나가지 않는다. 그 점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혹시 엔지니어팀에선 퇴사하는 분이 없나요?”

그렇게 물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예. 없습니다.’뿐이었다. 다음 주면 신 팀장 당신도 퇴사하는 걸 내가 아는데. 박무현이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기왕이면 엔지니어 가팀 사람들을 전부 데리고 나가고 싶다. 백애영이 했던 말대로 금고 같은 곳에다가 사람들을 다 담아 해저기지를 떠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들을 설득할 여력도, 끌고 나갈 무력도 박무현에겐 없었다. 그나마 다음 주면 신해량이 해저기지를 나간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큰 위안이 됐다. 어쩌면 서지혁도 신해량과 같이 나가는 건 아닐까. 식사를 마친 신해량을 빤히 쳐다보며 그런 희망을 품어봤다.

문제는 백애영의 계약 기간이었다. 아직 계약만료까지 두 달이나 더 남았다는 거다. 저 둘이 퇴사할 때 백애영도 데려가라고 할 수는 없나.

겸사겸사 이지현과 강수정도 데리고 가면 좋고. 김재희는 쉽지 않겠지만 신해량이 무력으로 끌고 갈 수 있을 거 같았다. 정상현까지도 신해량 선에서 얼마든지 억지로 데려나갈 수 있을 거 같고.

설득만 할 수 있다면 유금이나 김가영, 엠마와 투마나코까지 전부 대한도 밖으로 내보내고 싶다.

이런 우울하고 답답한 해저기지 따위 그냥 때려치우면 참 좋을 텐데. 슈란과 타마키도 여기서 힘들어하지 말고 퇴사해버리면 좋지 않을까. 리코나 스미레도…….

끝없이 떠오르는 얼굴에 박무현은 한숨만 내쉬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단 사실만 재차 확인받고 있었다. 참으로 착잡하고 무기력한 기분이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미래의 일을 떠벌이며 그들을 대한도에서 나가게 한다? 대체 누가 따라주겠는가.

무한교는 분명 해저기지에 숨어들어왔지만 아무 짓도 벌이지 않고 있었다. 만약 박무현이 기적적으로 사람들을 설득에 성공하여 탈출시켰는데 이전과 달리 해저기지에 테러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박무현은 졸지에 그들의 일자리만 빼앗은 미친놈이 되고 만다. 그 책임을 떠안을 수 있을까? 박무현은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무한교가 그때의 일을 다시 저지른다면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가 없다. 아니, 살아서 나갈 수야 있겠지만 허무하게 죽을 확률이 더 높았다. 그런데 이들을 여기에 두고 자신만 혼자 도망치는 게 맞나.

점점 입맛이 없어졌다. 박무현은 퇴사하고 해저기지에 남겨질 이들을 위해 무언가 해주고 싶었다. 적어도 제게는 남들이 모르는 정보가 있었으니 아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알려주어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져있던 박무현이 눈앞의 남자를 쳐다봤다.

“해량 씨. 부탁이 있습니다.”

“예.”

결단은 빨랐다.

“헬기장까지 저를 배웅해주실 수 있을까요? 가는 길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말씀해주실 순 없는 겁니까?”

박무현이 주위를 둘러봤다.

“예. 여기서는 곤란합니다.”

식당 안에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신해량은 거기까지만 듣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 * *


배웅해달라 한 말이 짐을 들어달란 뜻은 아니었는데.

신해량은 자연스럽게 박무현의 캐리어를 들고 함께 중앙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 안에도 사람이 있어서 그런지 신해량은 부탁이 무엇이냐고 대뜸 묻지 않았다.

대한도까지 올라가려면 10분 남짓한 시간이 걸린다. 박무현은 멍하니 엘리베이터 안을 살피다가 창밖의 캄캄한 바다를 쳐다봤다.

언젠가 신해량과 김재희 두 사람과 꽉 끼어 잠수정에 탔을 때 저 심해 속에서 거대한 눈알을 마주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정말 심장이 멎는 줄 알았는데. 너무 놀라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다는 게 어떤 건지 박무현은 그때 처음 알았다.

다행히 지금은 캄캄한 바닷속에서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빛이 닿지 않는 바다는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만큼 어두웠으며 차가웠다.

저 칠흑 같은 바닷물이 얼마나 뼈가 시리도록 차가운지 잘 알고 있었다. 숨 막히는 바닷속에서 상어에게 옆구리가 물어뜯겨 죽어보기도 했다. 박무현은 그 일이 반복될까 봐 무서웠다.

“저는 바다랑 맞지 않는 거 같습니다.”

투명한 엘리베이터 벽 너머의 심해를 바라보던 박무현이 중얼거렸다. 엘리베이터 입구 쪽을 응시하던 신해량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모두가 바다에 적응하는 건 아닙니다.”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그 말이 어쩐지 위로가 됐다. 박무현은 눈을 내리뜨며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신해량은 다시 엘리베이터의 위치를 확인하며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푹 주무실 수 있길 바랍니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다시 엘리베이터 안에는 침묵이 내리 앉았다. 어색함이나 불편함은 없었다. 박무현은 신해량과의 침묵이 이제는 익숙했다.

마침내 엘리베이터가 대한도에 다다랐다. 사람들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뒤따라 내릴 줄 알았던 신해량은 박무현에게 먼저 나가라며 고갯짓을 했다.

“해량 씨.”

“예.”

헬기장으로 향하는 길. 잠시 뜸을 들이던 박무현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들이 전부 믿기지 않을 거라는 거 압니다. 그래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방이 탁 트인 공간에서는 어떤 말을 해도 바람과 파도 소리에 묻힐 것만 같았다. 어차피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그냥 근방에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괴성을 지르지 않는 한 여기서 박무현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신해량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말씀해주십시오.”

신해량의 대답에도 섣불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박무현은 잠시 망설이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해저기지 내에 사이비종교 신도가 여럿 잠입해있습니다.”

시작부터 미치광이의 정신 나간 소리처럼 들렸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박무현은 쉬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들은 언젠가 해저기지를 테러할 겁니다. 제가 알기론 5월 31일이 계획 예정일이었는데 아직까지 잠잠해서 문제없을 거 같기도 합니다. 그래도 조심하세요. 그들은 돌격소총을 들고 사람들을 해저기지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묶어둘 것이며, 많은 수의 사람이 해저기지 안에서 죽기를 원합니다.”

“…….”

“만약 해량 씨가 퇴사하기 전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백호동 탈출정은 이용하면 안 됩니다.”

“이유가 뭡니까.”

“엔지니어 나팀이 개인적인 원한으로 백호동 숙소 탈출정을 망가뜨렸습니다. 탈출정을 사용해 탈출한다고 해도 해수면까지 가지 못하고 가라앉아 그 안에서 사망할 겁니다.”

신해량은 대놓고 박무현을 미심쩍어하고 있었다. 오늘따라 신해량의 표정이 잘 읽히는 기분이다. 그러나 박무현은 개의치 않았다. 아직 신해량에게 알려주어야 할 정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나팀은 총으로 무장한 채 현무동에서 중앙동으로 갈 겁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용할 현무동 탈출정을 보유하고 있으니 그걸 탈취해서 사용할 수 있다면 사용해도 좋습니다.”

헬기장까지 걸어가는 동안 쉬지 않고 떠들어대고 있으니 슬슬 숨이 찼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었다.

“라팀은 청룡동 탈출정 포트에서 무장한 채 들어오는 사람들을 공격할 겁니다. 그러니 청룡동 탈출정 쪽으로 갈 때는 특히 유의하세요. 그 과정에서 지혁 씨가 다칠 수도 있으니 반드시 조심하셔야 합니다…….”

“…….”

“아. 엔지니어 나팀과 라팀이 기행을 벌이는 이유는, 그들이 사이비 테러리스트들과 협력 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해저기지 내에 총기를 가지고 들어올 수 있었던 겁니다. 그래도 슈란 씨와 하이윤 씨는 믿을 만한 사람들입니다.”

아마도 그렇겠지? 박무현은 신해량을 엄호하다 피 흘리며 죽은 하이윤을 떠올렸다. 엘리베이터 안에 덩그러니 누워있던 그 시체의 모습을. 까마득하게 먼일처럼 느껴지면서도 당장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르기도 했다. 박무현은 마른 침을 삼키며 말했다.

“아무튼 그 두 사람이 도움을 청한다면 응해주세요. 해가 될 인물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청룡동 잠수정에는 엔지니어 사팀의 썸머 씨가 숨어있을 겁니다. 그를 슈란 씨와 함께 탈출시켜주신다면 좋을 거 같습니다.”

드디어 저만치서 헬기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박무현은 밭은 숨을 고르며 말했다.

“청룡동 탈출정이 남아 있다면 사용하셔도 됩니다. 거기도 라팀이 쓰려고 탈출정을 멀쩡히 남겨뒀거든요. 하지만 주작동 탈출정은 백호동과 마찬가지로 고장 나 있으니 사용하시면 안 됩니다.”

거기까지 말하던 박무현은 아주 중요한 사실을 한 가지 떠올렸다.

“아, 근데 현무동 탈출정 중에 하나가 고장 나 있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당연히 탈출하고 없어야 할 백애영이 백호동 숙소로 나타났을 때의 충격이란.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때 백애영과 단둘이서 해저기지를 빠져나가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모른다. 동시에 박무현이 처음으로 대한도 땅을 밟은 순간이기도 했다. 아마 그 방법이 현재 해저기지에 남게 된 사람들에게도 가장 확실한 탈출 경로가 되어줄 거 같았다.

“제일 추천하는 탈출 방법은 무장한 후에 중앙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겁니다. 총 든 사이비들이 4해저기지까지 내려온다면 제압한 후 엘리베이터에 탑승하세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팀과 라팀을 제압하여 무장 해제한 다음 해량 씨와 지혁 씨, 애영 씨가 무장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그들이 사람에게 총부리 겨누는 일이 아예 생기지 않는다면 가장 좋겠지만.

“주작동 숙소에 연구원인 가영 씨가 갇혀있을 겁니다. 꼭 구해주시길 바랍니다. 탈출정을 사용하고 싶으시겠지만, 변수가 워낙 많아 추천하고 싶지 않습니다. 중앙 엘리베이터가 확실히 안전해요. 하지만 중앙 엘리베이터는 2해저기지에 반드시 멈출 겁니다. 무한교 놈들이 그렇게 만들어 둘 테니 엘리베이터를 고장 내세요. 애영 씨가 할 줄 알 겁니다. 어느 층에서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지 않게 한 다음엔 곧장 대한도로 향하면 됩니다. 제가 없으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엘리베이터가 0층에 다다르지 못하고 멈춘다면, 엘리베이터 천장을 열고 비상구출문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탈출했을 때의 기억을 최대한 자세히 떠올리려 애썼다. 가급적 중요한 내용만 담아 최대한 축약해서 설명하려고 했는데 자꾸만 말이 길어졌다. 신해량에게 알려주고 싶은 정보가 너무 많았다.

그들을 해저기지에 남겨두고 혼자 도망간다는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덜고 싶은 박무현의 발악이었다.

“바깥 천장에 있는 기계실의 제어반 안에 든 손잡이를 총으로 맞히면 엘리베이터가 작동할 겁니다. 근데 너무 멀고 손잡이도 작아서 아예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엘리베이터와 이어진 와이어로프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데 해량 씨나 지혁 씨, 애영 씨는 문제없겠지만 다른 분들이 아마 힘들 겁니다. 저는 엄두가 나지 않았거든요. 그러니까 그때는…… 그때 가서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할 거 같습니다.”

이런 불확실한 말은 하고 싶진 않았는데. 확실하고 분명한 정보만을 전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엔 이런 말밖에 해줄 수가 없다니. 박무현은 착잡한 기분으로 헬기장에 도착했다. 저 멀리 푸른 하늘을 가르며 다가오는 헬기가 보였다.

“무장하신 분들이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벗어나 아직 엘리베이터에 남아 있는 인원들을 끌어올려서 구조하셔도 될 겁니다. 만약 엘리베이터가 멀쩡하게 대한도까지 올라간다면…… 이런 고생을 할 필요 없겠죠.”

박무현은 점점 가까워지는 헬기를 멍하니 올려다보며 말했다.

“무사히 대한도까지 왔다면 몸을 숨기셔야 합니다. 대한도에도 테러범들이 돌아다니고 있거든요. 병원은 아수라장일 거고 본부는 이미 테러범들에게 점령당해 있을 겁니다. 강당에는 인질들이 묶여있고…….”

횡설수설 떠들던 박무현이 신해량을 쳐다봤다.

무심한 시선과 눈이 마주치자 박무현은 자신이 얼마나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는지 문득 깨달았다.

제게는 무한교의 테러가 숨 막힐 정도로 두렵고 무서운 현실이었지만, 남들이 듣기엔 그저 정신 나간 미친 소리에 불과할 테니.

그럼에도 신해량은 대체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고 따져 묻는 법이 없었다. 박무현은 지긋한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깔고 전보다 조금 주눅 든 목소리로 말했다.

“3해저기지부터는 잠수정과 탈출정을 이용해도 괜찮습니다. 근데 잠수정은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네요.”

어느새 헬기가 착륙했다.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주위에 거센 바람을 만들었다. 박무현은 굴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신해량이 박무현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

“정말 부득이한 경우에는 계단도 나쁘지 않은 선택입니다. 일단 사람을 마주칠 일이 전혀 없었거든요. 그리고 2해저기지의 케이블카는 절대 타지 마세요.”

빠르게 돌아가던 헬리콥터의 프로펠러가 멈췄다.

헬기에서 내린 강수혁이 헬기 안에 든 짐들을 나르기 시작했다. 착륙하자마자 사람을 태우고 곧바로 이륙하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박무현은 안도했다. 아직 신해량에게 할 말이 조금 남아 있던 탓이었다.

“3해저기지에서 2해저기지로 가는 계단은 4천 개가 넘긴 해도 막상 오르니까 어떻게든 오르긴 하더라구요. 부상자 없이 가면 좋겠지만 부상자가 생겨도 버리지 말고 함께 올라가셨으면 합니다. 참고로 2해저기지로 가는 계단은 꼭대기까지 가도 출구가 나오지 않을 겁니다. 출구가 그보다 아래층에 있으니 당황하지 마시고 천천히 찾아보시면 됩니다. 정확한 층 수는……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박무현은 신해량 손에 들려있던 짐을 가져왔다.

“아무튼, 이용할 수 있는 것들은 최대한 이용해서 탈출하시길 바랍니다.”

헬기 가까이 다가가자 강수혁이 조금만 기다려달라며 손짓했다. 박무현은 대답 대신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미소 지으며 고개를 까닥였다. 그리고 헬기 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그 일이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게 가장 문제입니다. 제가 제일 걱정하는 일이기도 하고요.”

박무현이 고개를 수그렸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혁 씨도 이번 주에 퇴사하는 거 아니었나요? 저는 지혁 씨와 같이 대한도를 나가게 되는 줄 알았습니다.”

“…….”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해저기지에 오래 계셔서 좋을 게 없습니다. 해량 씨도 어차피 다음 주면 해저기지를 떠나시겠죠. 그럼 애영 씨 혼자서 해저기지를 탈출해야 할 텐데, 혼자라면 얼마든 탈출하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거 알지만 다른 분들까지 챙기면서 가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그때가 되면 백애영 옆에는 박무현도 없을 거다. 서지혁도, 신해량도 없이 백애영 혼자서 일반인들을 데리고 대한도로 올라가야 한다.

박무현은 기회가 생기자마자 총을 들고 있음에도 자신과 백애영에게 덤벼들던 헤일리와 제니퍼를 떠올렸다. 강당에서 있었던 일들도 연이어 떠올랐다. 속이 쓰렸다. 정말로 쉽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든다.

“그러니까 저는 해량 씨가 애영 씨도 데리고 같이 해저기지를 떠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왕이면 다른 분들도 전부 해저기지를 떠났으면 합니다.”

“그렇군요.”

엘리베이터터에서 내려 헬기장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박무현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던 신해량은 그 한 마디로 깔끔하게 정리했다.

박무현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신해량은 제 말을 믿지 않는다. 아니면 아직 박무현의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판별하는 중이라던가.

“선생님! 탑승하세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초조해진 박무현이 신해량을 쳐다보며 다급히 덧붙였다.

“제 말이 허황된 소리로 들릴 거 압니다. 제가 우려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고요.”

신해량이 자신의 말을 전부 믿지는 않더라도 절대 이 정보들을 무시하게 두어선 안 됐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린 정보를 우스갯소리로 넘기진 말아 주세요. 저는…….”

잠시 목이 메어 말문이 막혔다. 박무현이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해량 씨가 6억을 어디에다가 썼는지 알고 있습니다.”

신해량의 눈이 커졌다. 보기 드물게 동요하는 표정을 보며 박무현은 그가 정말 대단한 비밀을 제게 알려줬던 거구나 깨달았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조심하세요, 해량 씨. 제발 죽지 마세요.”

박무현이 이를 악물며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부디 몸 성히 퇴사하시길 바랍니다.”

뒤돌아선 박무현이 목에 빳빳이 힘을 주고 걸었다. 미련과 죄책감을 신해량에게 떠넘기고 도망치는 이 순간에 발목 잡히지 않기 위해.

마침내 헬기에 올라탄 박무현이 쓰러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쿵쾅 날뛰었다. 차게 식은 손을 그러쥐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곁눈질로 창밖을 힐끔 쳐다봤다.

이제야 신해량을 겨우 쳐다볼 수 있을 거 같아서.

이륙 준비를 마친 헬기가 서서히 허공으로 떠오르고,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순간까지도 신해량은 박제된 사람처럼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움직이질 않았다.

박무현은 속상한 건지 개운한 건지 모를 갑갑함을 떨쳐내며 창밖을 향하던 시선을 거두었다.


* * *


드디어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별안간 해저기지를 때려치우고 돌아온 아들을 나무라지 않았다. 동생인 박무진은 놀란 얼굴이긴 했지만 집으로 돌아온 형을 반겨주었다. 가족들을 보며 박무현은 간신히 눈물을 삼켰다. 두 사람을 또 한참 동안 못 보게 될까 봐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이후 박무현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한동안은 잠을 설치며 고생하긴 했지만 점점 수면 시간이 길어졌고 이제는 완벽히 불면증을 고쳤다.

잠을 자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잘 때가 되면 잠이 든다. 악몽을 꾸긴 하지만 침대에서 떨어져 잠에서 깨는 일도 없었다. 비록 생활고에 허덕이게 됐지만 언제 죽을지 몰라서 전전긍긍하지는 않았다.

달력을 보니 곧 신해량이 퇴사할 날짜였다. 박무현은 과연 그가 자신의 말을 믿고 사람들을 챙겨 해저기지를 나갈지 궁금해졌다. 알아볼 방도는 없었다.

뭐가 됐든 다들 무사했으면 좋겠다. 박무현은 간절히 바랐다. 아무도 죽지 않고, 다치지도 않기를.

어머니와 둘이서 오붓한 식사 시간을 보내고 박무현은 부엌으로 가 설거지를 하던 중이었다.

“세상에. 저게 무슨 일이니.”

야단스러운 목소리에 박무현이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는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세제 거품을 잔뜩 머금은 수세미로 그릇을 뽀득뽀득 문질러 닦던 박무현의 귀에도 시끄러운 TV소리가 들렸다.

“……?”

고개를 길게 빼내 거실의 TV를 들여다보던 박무현은 그대로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속보] 북태평양 해저기지 피습,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점거


뉴스에서는 속보가 한창이었다.

“무현아. 너 지난주에 저기서 퇴사한 거 아니었니?”

“…….”

쨍그랑. 박무현의 손에 떨어진 그릇이 바닥과 부딪혀 산산이 부서졌다.

“어머, 얘! 무현아!”

박무현은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치 주박이 걸린 사람처럼 뉴스 화면만 멍하니 바라봤다.


[시간은 되돌려 과거로 갈 수 있다고 믿는 테러리스트 단체 ‘무한교’가 현재 북태평양 해저기지를……]


물에 빠진 것처럼 온 세상의 소리가 먹먹해졌다. 

귓가에서 웅웅 울리는 앵커의 목소리가 점점 아득하게 멀어져 간다.


‘선구자’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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