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량 씨. 제발 가만히 계세요.”
“여기서 나가고 싶지 않으십니까.”
“나가긴 나갈 건데요…….”
박무현이 어금니를 질끈 문 채 읊조렸다.
“지금은 잠시만 가만히 계셔주세요. 부탁입니다.”
그제야 박무현 밑에서 꿈지럭대던 움직임이 멈췄다. 신해량이 얌전해진 틈을 타 박무현은 겨우 한숨 돌리며 두 팔로 바닥을 짚어 몸을 최대한 들어 올렸다. 조금이라도 신해량과 떨어져 보려는 몸부림이었다. 어정쩡하게 바닥을 딛고 있는 박무현의 무릎에 신해량의 엉덩이가 꾹 닿아 짓눌려있는 탓에.
엉덩이만 닿으면 모르겠는데 마음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는 무릎이 상대의 회음부까지 압박하듯 짓누르고 있었고, 신해량의 단단한 허벅지는 박무현의 무릎 위쪽 허벅지에 닿았다가 살짝 떨어지길 반복하며 원치 않는 접촉을 만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박무현이 어쩌다 신해량과 엉망으로 몸이 뒤섞인 채 비좁은 캐비닛 안에 갇혔는지 설명하려면 약 10여 분 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 * *
두 사람은 시간이 맞으면 종종 저녁을 같이 먹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퇴근한 박무현이 체육관으로 내려가 신해량을 기다렸다.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체육관은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신해량은 아직 직원을 두지 않고 혼자서 체육관을 운영하고 있었기에 마감을 앞두고 이리저리 바삐 돌아다녔다. 보다 못한 박무현이 거들기로 했다. 일손은 하나라도 더 있으면 좋은 법이니까.
데스크 뒤편으로 이어지는 창고는 넉넉하진 않아도 비좁은 공간은 아니었다. 그곳엔 체육관에 필요한 보조 기구뿐만 아니라 기타 생활용품이 더러 놓여 있었다. 체육관을 인테리어 하는 동안 여기서 생활이라도 했던 것처럼.
그중 가장 박무현 눈에 띄었던 건 구석에 버젓이 놓여 있던 차가운 색의 기다란 캐비닛이었다. 낡아 보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새것 같지도 않은 캐비닛을 빤히 쳐다보던 박무현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어디서 난 거냐 물어봤다. 신해량은 캐비닛을 한번 흘끔 보고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서지혁이 집에 둘 곳이 없어 잠시 여기에 두기로 했다고. 서지혁에게 저런 캐비닛이 왜 필요한 거냐고 물으니 거기까지는 신해량도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박무현이 캐비닛에서 한참 눈을 떼지 못하고 있자 신해량은 ‘선생님도 이런 게 필요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그런 게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지만 신해량은 한번 살펴보라며 선뜻 캐비닛 문을 열어주었다.
쇳소리 하나 없이 매끄럽게 캐비닛 문이 열렸다. 기름칠이 잘 되었는지 경첩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본체가 철제인 만큼 캐비닛은 손으로 살짝만 건드려도 퍽 요란한 소리가 났다.
박무현은 머쓱하게 목덜미를 긁적이며 캐비닛 가까이 다가갔다. 실은 여기에 서지혁을 구겨 넣어 놓고 문을 닫은 채 밤새 내가 너한테 얼마나 서운한 게 많은지 울분을 토하고, 서지혁은 영문도 모른 채 잘못했다며 싹싹 비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신해량은 그것도 모르고 불필요한 친절을 베풀었다.
사람 하나는 거뜬히 가둘 만한 크기라서 그런가. 괜한 헛생각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박무현은 눈으로만 대충 캐비닛을 훑어보았다. 자신이 혼자 들어간다면 비좁긴 해도 답답하진 않을 만한 크기였다. 그러나 신해량이나 서지혁이 들어간다면 사방으로 꽉 끼어서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될 거다.
아니, 애초에 그 둘이 여기에 들어갈 수 있기나 할까. 신해량은 입구에서부터 어깨가 끼어버릴 것 같았다. 잠시 딴생각에 빠진 박무현이 순간 발을 헛디뎠다.
그래, 거기서부터 잘못됐다.
중심을 잃고 휘청이던 박무현은 기어이 자신의 발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 앞에 서 있던 신해량이 재빠르게 박무현을 받아내긴 했으나 두 사람의 몸이 겹쳐지며 캐비닛 안으로 구겨져 들어가는 꼴이 됐다.
중심을 잃은 건 캐비닛도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위태롭게 흔들리던 캐비닛이 기우뚱 쓰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신해량이 반사적으로 박무현을 품에 안아 몸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캐비닛 문이 닫히며 바닥으로 쿵 쓰러졌다. 그리하여 박무현은 신해량과 함께 쓰러진 캐비닛 안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박무현이 헛발을 디디며 아차 하는 순간 이미 그는 어두컴컴한 캐비닛 안에 갇혀 있었다. 신해량 품에 폭삭 안긴 채로.
당황한 박무현이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가 캐비닛 벽에 등이 부딪혀 도로 쓰러지고 말았다. 하필이면 캐비닛의 입구가 바닥 쪽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문을 열고 나갈 수조차 없었다.
신해량은 놀란 기색도 없었다. 그저 어쩔 줄 몰라 하는 박무현에게 진정하라고 나직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그리고 안간힘을 쓰며 몸을 떼어내려는 박무현의 뒤통수를 감싸 자신 쪽으로 슬쩍 당겼다. 덕분에 두 몸뚱이가 더욱 틈 없이 밀착했고 박무현의 등과 캐비닛 사이에 작은 공간이 생겼다.
신해량은 그곳으로 손을 뻗어 무언가를 확인하고 조작하는 듯했다. 박무현으로서는 뒤통수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이 무엇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신해량이 지금 뭘 하는 건지, 거기까지 생각할 겨를조차 없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는 당장 타인과 안전거리 없이 한껏 밀착해있는 모든 부위에 신경이 쏠려있었으므로.
신해량의 오른 다리는 박무현에게 깔려있었고, 어정쩡하게 벌어진 신해량의 다리 사이에는 박무현이 끼어있었다. 그 때문에 신해량의 왼 다리가 들려 올라가 박무현의 오른쪽 허벅지 위에 걸쳐졌다. 즉, 엉덩이는 신해량의 허벅지에 짓눌리고 주요부위는 신해량의 앞섶과 맞대어 움직일 때마다 비벼진다는 거였다.
참으로 끔찍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박무현더러 가만있으라던 신해량은 볼 일을 다 끝냈는지 몸을 비틀며 캐비닛을 이리저리 두드려 보았다. 박무현과 닿아 있는 부위가 불편하지도 않은지 움직임에 거리낌이 없었다. 덕분에 괴로움은 오롯이 박무현의 몫이 되었다.
여기서 더 자극이 주어지면 정말 끔찍한 불상사가 벌어지고 말 거다. 그러니 박무현은 신해량을 붙들고 제발 얌전히 있어 달라고 애원할 수밖에 없었다.
신해량은 박무현의 바람대로 몸에 힘을 빼고 축 늘어져 얌전히 숨만 쉬었다. 그 위에서 박무현은 엎드려 뻗친 사람처럼 두 팔과 다리에 힘을 주어 최대한 몸을 들어 올렸다. 어떻게든 접촉 부위를 떼어내려는 필사적인 박무현의 노력을 관망하던 신해량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체력낭비가 지나치십니다.”
그걸 누가 모르냐고. 사람 속도 모르고 팔자 편한 소리를 해대는 신해량 때문에 박무현은 순간 울컥했다. 난 벌써 네 놈 거에 비벼져서 반쯤 서버렸단 말이다. 그러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없었기에 박무현은 긴 한숨을 내쉬며 ‘저도 압니다.’ 정도로 대꾸했다.
자신과 달리 신해량의 아랫도리는 별다른 소식 없이 잠잠했기에 박무현은 이 처참한 사실을 반드시 숨기고 싶었다. 부디 신해량이 자신의 신체 변화를 모르길 간절히 바랐지만.
“선생님은 외부자극에 몹시 취약하신 편이군요.”
눈치도 없이 떠드는 신해량 때문에 박무현은 딱 죽고 싶었다.
“여기서 그런 걸 분석하지 말아 주세요. 정말 수치스럽습니다.”
“원치 않은 자극에도 남성의 생식기는 발기할 수 있으니 수치스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압니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이미 그러고 있으니까 굳이 설명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박무현은 차라리 기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빛마저 차단된 비좁은 공간에 남자 둘이 몸을 겹치고 쓰러져서는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니.
“저는 괜찮으니 편하게 계시지요. 자세가 좋지 않아 몸에 무리가 갈 겁니다.”
벌써 몸을 지탱하고 있는 두 팔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신해량의 말마따나 자세가 좋지 않으니 다리보다 두 팔에 체중이 더욱 실려있었다. 이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으며 고집을 부려봤자 다음 날 근육통으로 고생만 할 게 눈에 훤했다.
결국, 박무현은 몸에 힘을 풀고 신해량 위로 풀썩 쓰러져 누웠다. 자포자기에 가까운 무력감이었다.
신해량의 딱딱한 몸뚱이는 매트리스로서 성능이 썩 좋지 않았다. 그래도 괴상한 자세로 얼차려 받는 것처럼 버티고 있던 것보다 편하기는 했다. 밀접하게 짓눌린 아래쪽 상황은 그렇지 않은 거 같았지만.
박무현은 찝찝한 아랫도리 감각을 애써 모른 척했다. 그리고 긴 숨을 내쉬며 눈을 깜박였다. 신해량이 호흡할 때마다 두툼한 몸뚱이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가슴팍에 한쪽 뺨을 대고 누운 박무현은 쿵, 쿵, 쿵, 귓전을 때리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묘하게 맥박이 빠르지 않나. 그런데 이게 제 심장 소리인지 신해량의 것인지조차 분간이 안 됐다.
캐비닛 안의 공기가 점점 달궈지고 있었다. 아니, 그냥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맞닿은 부위에서 뭉근한 열이 피어오르는 듯했고 두 사람의 숨소리가 천둥처럼 요란하게 귓가를 울렸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분위기가 이상야릇해지는 기분이 들었기에 박무현은 어색하고 뻘쭘한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억지로 말문을 열었다.
“엔지니어셨잖습니까. 여기서 못 나갑니까?”
솔직히 아래쪽으로 피가 쏠리는 신경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박무현의 질문에 가만히 누워있던 신해량이 살짝 고개를 움직이는지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알고 싶지 않아도 그의 가슴팍에 버젓이 뺨을 대고 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신해량아. 네 몸은 딱딱하지만, 가슴은 생각보다 푹신하구나. 박무현은 머릿속을 스치는 끔찍한 감상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움직임이 제한되어 있어 쉽지 않습니다. 밖에서 열어주길 기다려야 할 거 같습니다.”
“…….”
“지혁이를 불렀으니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예. 지혁 씨를 부르셨군요…….”
그나마 반가운 소식이었다.
박무현은 그때까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원치 않는 성감을 떨쳐내려 노력했다. 이미 애국가는 4절까지 세 번 하고도 두 번 더 부르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좀처럼 서지혁이 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애가 타들어 가는 심정으로 임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지혁아. 신해량이 너 불렀다잖아. 언제 올 거야. 오고 있긴 하니. 오늘따라 네가 많이 보고 싶구나. 언제 와. 빨리 오라고, 이 자식아.
인내심이 바닥날수록 날 것의 모습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 끝은 가장 추악한 남 탓으로 이어졌다. 이게 전부 다 신해량의 몸이 너무 큰 탓이라고. 김재희의 말을 빌려 저 하마 같은 남자와 캐비닛에 끼어있으려니 몸이 안 부대낄 수가 없는 거다.
내가 지금 이 나이 먹고 번뇌에 빠져야겠냐고…….
박무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가까스로 흉한 속내를 가라앉혔다. 성격이 더 나빠지기 전에 어떻게든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했다. 얼굴에 닿은 말캉한 가슴살도, 호흡할 때마다 부푸는 거대한 몸뚱이의 부피감도, 아랫도리에서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원치 않은 성감까지. 전부 의식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곳으로 잠시나마 신경이 쏠리도록 해선 안 됐다.
“해량 씨 몸이 좋으시네요.”
그래서 아무 말이나 꺼낸 거였는데. 박무현은 말을 뱉고 나서야 이 주제는 지금 상황에서 적절치 않았음을 깨달았다.
참담한 심정에 박무현은 그냥 눈을 감았다. 여기서 혀를 깨물면 최소한 기절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선생님도 몸이 좋아지셨습니다.”
칭찬을 하면 다시 칭찬으로 돌려주는 메커니즘이라도 가진 로봇처럼 신해량이 기계적으로 말했다. 그리고는 양옆으로 어정쩡하게 구기고 있던 팔을 뻗어 박무현의 등과 허리를 더듬었다. 얘가 왜 이러지, 하는 마음과 동시에 박무현의 머리 위로 나직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근육이 많이 붙으셨군요. 체중은 얼마나 느셨습니까.”
촉진이라도 하는 양 사감이라고는 하나 없는 무미건조한 손길이었다. 그 손길에 예민 떠는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박무현이 이를 질끈 물고 대답했다.
“76kg입니다.”
“그렇군요. 2kg 더 증량해도 괜찮을 거 같습니다.”
“예…….”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했으나 박무현은 이 이상 자신의 몸에 어떠한 자극도 주어져선 안 된다는 결론만 나왔다.
“그런데 저기, 해량 씨…… 그, 이제 그만 만지면 안 될까요…….”
“아.”
박무현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중얼거렸다. 신해량은 짤막한 사과와 함께 손을 뗐고 분위기는 다시 뻘쭘해지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면 왜 다 이런 식으로 끝이 나는 건지. 그냥 입을 다물고 있어야 했나.
하지만 입을 꾹 닫고 있으면 캐비닛 안에 울리는 신해량의 숨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심장 소리도 지나치게 거슬렸고 몸을 달구는 열기 또한 점점 선명해지기만 하니, 참으로 곤란하고 불편한 상황이었다.
“지혁 씨가 언제쯤 올까요…….”
박무현은 정말 눈물이 날 거 같았다. 대체 언제 여기서 나갈 수 있을까. 이러다가 싸버리는 건 아니겠지. 그날이 아마 자신의 기일이 되지 않을까.
최악의 최악을 상상하던 박무현은 애써 머릿속을 비우며 서지혁이 어서 와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 세상에 구원자가 존재한다면, 누군가를 과거로 데려다줄 사이비 교주가 아니라 캐비닛에 갇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미천한 중생을 끄집어내 줄 서지혁이 아닐까.
김재희가 듣는다면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칠지도 모르겠다.
“멀리 가진 않았을 테니 금방 올 겁니다.”
“어딜 갔는데요?”
“퇴근했습니다.”
“…….”
실낱같은 희망을 꼭 그러쥐고 있던 박무현의 얼굴에 금이 갔다. 퇴근한 놈을 부른다고 다시 돌아오겠어? 껄렁껄렁하게 웃으며 신해량이 없을 때마다 틈틈이 그를 험담하던 서지혁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신해량이 지금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지는 못했을 거 같은데, 과연 퇴근 중이던 서지혁이 돌아올까? 어쩌면 밤새 신해량과 이러고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하던 그때였다.
“어, 뭐야? 창고에 있다더니?”
캐비닛 바깥에서 우당탕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신해량 이 새끼 어디 갔지.”
신랄한 서지혁의 말소리에 박무현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정작 신해량은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아니, 아주 작게 헛웃음을 지은 거 같기도 하고…….
“서지혁!”
박무현이 한껏 몸을 웅크린 채 신해량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데, 예고도 없이 신해량이 캐비닛 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쾅!
머리를 울리는 굉음에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정도 힘이면 진작 캐비닛 찢고 나갈 수 있었던 거 아냐? 박무현이 슬그머니 눈을 떠서 확인해봤으나 캐비닛 벽에 구멍이 뚫려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엥? 팀장님 그 안에 있어요?”
경쾌하면서도 묵직한 발소리가 캐비닛 가까이로 저벅저벅 다가왔다.
“방금 제가 한 말 들은 건 아니죠?”
“이거나 치워.”
“에에이, 나와서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게다가 이거 문이 없는데요? 내 캐비닛을 어떻게 한 거야?”
“지혁 씨 제발…… 저 좀 꺼내주세요…….”
“어? 어어? 무현 씨?! 쌤이 왜 거기? 아니, 두 사람 지금 거기 갇혀 있는 거예요?”
서지혁의 말이 길어지는 거 같아서 박무현이 창피함을 무릅쓰고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그러자 다급히 캐비닛을 두드리고 만지작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안에서는 신해량이, 밖에서는 서지혁이 정신없이 캐비닛을 건드려댔다. 안팎으로 주어지는 힘에 캐비닛이 몇 번 들썩들썩하더니 두 사람이 합을 맞춰 묵직한 캐비닛을 거둬내는 데에 성공했다.
환한 불빛이 각막을 강렬히 때렸고 박무현은 와락 인상을 찌푸린 채 허겁지겁 신해량의 몸 위에서 구르다시피 떨어져 나왔다.
“으아악! 선생님 왜 거기 있었던 거예요? 이게 무슨 일이지? 세상에, 얼굴 하얗게 질린 거 봐. 신 팀장한테 깔려서 압사당할 뻔했네.”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서지혁이 호들갑을 떨며 박무현 주변을 빙빙 맴돌았다. 엄밀히 따지면 박무현이 신해량에게 깔려있던 게 아니라 신해량이 박무현에게 깔려있었던 거였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박무현은 서지혁이 부디 제게서 멀찍이 물러나 주기를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마음 같아선 저리 가라고 밀쳐내고 싶기까지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지혁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음에도.
“집 가는 길에 신 팀장한테 호출이 와서 뭔가 했다니까요? 장난칠 양반이 아니니까 와보긴 했는데, 허어…….”
서지혁이 가슴팍을 퍽퍽 쓸어내리며 말했다.
“선생님 목소리 들렸을 때 진짜 깜짝 놀랐어요, 저.”
“저도 지혁 씨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박무현이 초췌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다리를 한껏 꼬았다. 식은땀으로 흥건해진 등이 축축하고 찝찝했다.
모든 기력을 소진한 박무현과 달리 신해량은 쓰러진 캐비닛을 원상복구 시키고 있었다. 힘도 좋지. 아니, 힘이 문제가 아니었다. 어쩜 저렇게 멀쩡할 수가 있나. 좀 전까지 자신과 좁은 캐비닛에 갇혀 있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차분하고 침착해 보였다.
박무현은 자기도 모르게 신해량의 앞섶을 흘끔 확인했다. 저와 달리 잠잠하다 못해 주인을 닮아 무덤덤하기까지 한 아랫도리 사정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니 더욱 자괴감이 들었다.
대체 이게 왜 가라앉질 않는 거냐. 내가 그렇게 혈기왕성할 나이는 아니잖아.
박무현은 속으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혹시나 서지혁이 눈치채기라도 할까, 잔뜩 긴장한 몸은 목석처럼 굳어갔다. 다 필요 없으니 어서 서지혁과 신해량이 창고에서 썩 나가주기만을 바랐다.
“그럼 저 퇴근합니다? 괜히 또 둘이 캐비닛 안에 들어가지 말고요, 예?”
“빨리 가.”
“고맙다는 인사도 안 하네.”
“이번 달 월급에 보너스 넣어줄게.”
“감사합니다, 관장님!”
서지혁은 요란한 입장만큼이나 퇴장할 때도 야단법석을 떨며 체육관을 떠났다.
박무현은 심호흡하며 애국가든 불경이든 뭐든 닥치는 대로 읊조리고 있었다. 신해량도 어서 퇴근해버리면 좋으련만 묵직한 발소리는 창고 입구가 아닌 박무현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예?”
깜짝 놀란 박무현이 고개를 번뜩 들어 신해량을 올려다봤다. 뭘 도와주겠다는 거지? 한껏 긴장하고 있던 탓에 신해량의 말을 바로 이해하질 못했다.
무뚝뚝한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한껏 오므리고 있는 자신의 다리 사이에 다다랐다. 신해량의 말뜻을 그제야 이해한 박무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박무현은 이미 다리를 힘껏 꼬고 있는 허벅지 위를 두 손으로 가리며 대답했다.
“괜, 괜찮습니다. 필요 없어요.”
“알겠습니다.”
단호한 거절에 신해량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그래. 가라. 제발 가줘. 날 혼자 둬. 그렇게 초조한 마음으로 입술을 짓씹던 박무현은 문득 치솟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다.
“해량 씨.”
“예.”
박무현의 부름에 신해량이 자리에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처음에는 당황해서 냅다 거절하긴 했다만 도대체 신해량이 어떤 도움을 주겠다는 건지 감도 오질 않아서.
“근데 제가 도와달라고 했으면, 뭘 어떻게 도와주시려고 했던 겁니까?”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짙은 시선이 박무현의 배 아래쪽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손 정도는 빌려드릴 의향이 있었습니다.”
“…….”
“…….”
“혼자 있고 싶습니다. 빨리 나가주세요.”
박무현은 황급히 신해량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이 체육관의 주인은 신해량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체육관 창고의 주인은 박무현이었다.
신해량은 가타부타 말없이 창고를 벗어났다. 훌쩍 떠나는 그의 귀 끝이 평소와 달리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박무현은 미처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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