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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러운 사이


몇 주 전, 박무현은 다니던 합기도장을 그만두고 치과 바로 아래층의 종합격투기 체육관을 등록했다. 퇴근하고 바로 2층으로 내려가 운동을 한 뒤 집에 가는 식으로 동선을 새로 바꿔본 것이다.

한 달이 안 되는 시간 동안 체육관을 다니던 박무현은 자신은 종합격투기와는 영 맞지 않는다는 사실만 깨달았다. 합기도를 배울 때보다 몸이 더 삐걱거리는 기분이었다. 가르치는 사람 얼굴을 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하지만 전부터 배워보고 싶었던 킥복싱을 배울 수 있었고 관장의 재량으로 주짓수도 조금씩 맛볼 수 있었으니 나쁘지 않았다. 재능이 없긴 해도 박무현은 종합격투기에 조금씩 재미를 붙여가는 중이었다.

실제로 이전보다 동체 시력과 반사신경이 좋아졌다. 꾸준히 근력운동을 곁들인 덕에 근육과 힘도 상당히 늘었다. 아직 100kg 정도를 거뜬히 들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게 터무니없이 까마득한 목표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몇 달 후면 신해량을 들쳐메고 계단을 오르는 게 그때만큼 힘들지는 않을 거다. 실제로 확인해볼 마음 따윈 전혀 없었지만 말이다.

박무현은 땀으로 흥건해진 얼굴과 목덜미를 수건으로 대충 문질러 닦으면서 탈의실로 들어갔다.

탈의실에는 좀 전부터 보이지 않는다 싶었던 신해량이 있었다. 막 씻고 나온 모양인지 머리가 흠뻑 젖어있었고 아직 닦아내지 못한 물기 때문에 헐벗은 몸뚱이가 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퇴근하세요?”

인기척도 없이 들어온 박무현의 질문에도 신해량은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 이미 탈의실에 들어온 사람이 박무현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덤덤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그리고 다른 설명 없이 어깨에 걸쳐두고 있던 수건으로 머리를 말렸다.

박무현은 자신의 짐을 넣어둔 사물함에 열쇠를 꽂아 넣고 문을 열었다. 그때까지도 신해량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신해량의 몸이 좋다는 건 굳이 옷을 벗겨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걸 직접 보게 되니 또 감상이 달라지는 거다. 얼굴도 잘난 놈이 몸까지 저렇게 좋을 일이냐. 반쯤 눈을 내리뜨고 머리를 말리는 신해량의 뒷모습을 박무현은 멍하니 쳐다봤다.

신해량은 짙은 색의 속옷만 한 장 걸친 채였다. 생각해보니 박무현은 그의 맨몸을 본 적이 없었다. 예고 없이 맞닥뜨린 살색의 향연인데도 낯부끄럽거나 민망하기보다는 경외심마저 들었다. 얼마나 운동을 해야 저런 몸이 나올 수 있는 거지?

머리에 묻은 물기를 어느 정도 털어낸 신해량은 선반에 올려둔 드라이기를 집어 들었다.

위이이잉-

시끄럽게 울리는 드라이기 소리와 뜨거운 바람이 탈의실 안을 답답하게 채워갔다.

박무현은 씻으러 왔다는 목적을 잊은 사람처럼 옷 벗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대신 신해량이 움직일 때마다 꿈틀거리는 근육들을 넋 놓고 바라봤다.

머리를 말리기 위해 올라간 신해량의 두 팔과 이어지는 매끈한 겨드랑이가 거울에 비쳤다. 저긴 또 왜 깨끗한 건데? 박무현이 속으로 경악했다.

신해량이 팔을 조금 내리고 등을 굽히자 팔부터 어깨와 허리에 붙은 근육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알리려는 듯 요란법석이었다. 밀도 높은 근육의 움직임을 보며 박무현은 저런 곳에도 근육이 붙어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과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몸이 아니라 저마다 쓰임새가 있고 필요에 따라 단련되어 그런지 헬스트레이너나 보디빌더처럼 근육들이 쩍쩍 갈라져 또렷한 경계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몸집이 워낙 커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박무현이 두 눈으로 신해량의 몸을 쓱 훑어내렸다.

새삼 거대한 몸집이었다. 저걸 자처해서 등에 지고 또 계단을 오르려 했다니. 진짜로 실행에 옮길 생각은 없었지만, 어쨌든 박무현은 몇 달 후에는 신해량을 업고 계단쯤 거뜬히 오를 수 있을 거라던 자신의 호기롭던 다짐을 철회했다.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머리를 말리던 신해량이 드라이기를 내려놓으며 박무현을 돌아보았다. 분명 두꺼운 몸인데도 골반은 좁다란 탓에 허리가 상대적으로 잘록해 보였다.

무게 중심이 한쪽 다리에 실리자 허벅지를 지지하는 둔부에 힘이 들어가며 근육이 바짝 올라붙는 것이 얇은 속옷 너머로 보였다.

“그…….”

뒤늦게 자신의 행동을 인지한 박무현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한껏 당황한 그의 입에서는 뇌를 거치지 않은 말들이 두서없이 튀어 나갔다.

“흉터가 많네요.”

박무현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아래로 내려갔다. 다시 봐도 감탄이 나올 만큼 짜임새 좋은 몸에는 이곳저곳 살벌한 모양새의 흉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겠지. 용병 일을 하던 놈이니까. 박무현은 자신이 말하고도 무슨 소릴 한 건가 싶어 이를 질끈 물었다.

“예.”

신해량은 덤덤하게 답하며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총상과 자상, 그리고 화상 자국까지. 다채로운 흉터가 즐비한 몸을 한번 힐끗 훑어보고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치과의사는 열이라도 나는 거처럼 얼굴이 뻘게져선 아주 형식적인 질문을 건넸다.

“아프진 않으시고요? 그, 후유증 같은 거라든가…….”

“멀쩡합니다.”

이미 다 아물어 새살까지 돋은 상처가 이제 와 아플 리 없었다. 그걸 박무현도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꾸만 입이 허튼소리를 나불거리는 탓에 강제로 멍청한 놈이 돼야 했다.

“예, 그, 뭐, 꾸준히 운동하면 저도 해량 씨 같은 몸을 만들 수 있을까요?”

남의 몸을 훔쳐봐도 문제인데 대놓고 관람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당장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다. 견디기 힘든 민망함에 박무현의 입에선 자꾸만 사고를 거치지 않은 말이 줄줄 샜다. 그의 상태를 증명하듯 양 귀 끝이 발갛게 물들었다.

티셔츠 소매에 두 팔을 끼우고 옷을 입으려던 신해량은 정작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박무현을 보는 눈빛은 의아함에 가까웠다. 어리둥절한 거 같기도 하고.

잠시간 박무현을 빤히 쳐다보던 눈동자가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는 시선이 노골적이었다. 박무현이 방금까지 신해량을 구경했던 것처럼 이번엔 신해량이 박무현을 관찰하고 있었다.

“예. 가능합니다.”

신해량은 티셔츠를 마저 입으며 말했다. 티셔츠 밖으로 머리를 빼내자 숱이 빼곡한 머리칼이 신해량의 반듯한 이마를 부스스하게 덮으며 내려앉았다. 박무현은 의외의 대답에 눈을 크게 뜨고 신해량을 쳐다봤다.

최근 운동을 하며 자신감을 많이 얻기는 했으나 정말 저 하마 같은 몸이 될 수 있다고? 자신이 물어봐 놓고 박무현은 믿기지 않는 대답에 미간을 좁혔다.

해저기지에서 돌아온 이후 줄곧 운동을 하고 있긴 했으나 신해량 같은 몸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절대 만들 수 없으리라는 걸 박무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신해량은 뭐 저리 확신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까?”

박무현의 의심에 신해량이 바지를 입으며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지금도 근육량이 많이 늘지 않으셨습니까.”

“예전보다야 늘긴 했죠.”

박무현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체력도 좋아지긴 했지만 해량 씨처럼 근육이 우락부락 붙지는 않아서요.”

“제가 우락부락한 몸은 아닙니다.”

신해량이 고개를 가볍게 까닥이며 반박했다. 박무현은 어이가 없었다. 저게 우락부락이 아니면 뭔데.

“해량 씨 정도면 보디빌더도 할 수 있지 않나요?”

“선생님께서는 제 몸을 굉장히 좋게 봐주시는군요.”

“눈 달린 사람이라면 다 그렇게 생각할 거 같습니다.”

저 몸을 도대체 누가 안 좋게 생각할 수 있을까. 신해량은 옷으로도 숨길 수 없을 만큼 나 몸 좋습니다를 드러내고 있었다. 일부러 저렇게 몸에 붙는 옷을 골라 입는 건지, 큰 옷을 주문했는데도 덩치 때문에 딱 맞게 들어가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박무현이 아는 신해량이라면 후자에 가깝긴 했다.

190cm가 넘는 훤칠한 키에 다 큰 성인도 한쪽 팔로 거뜬히 들 수 있을 것만 같은 체격과 몸매, 부담스럽지 않지만 헉 소리 나도록 빼곡한 근육 따위를 부러워하기엔 너무 나이를 먹긴 했어도 박무현은 저런 몸이 가질 기초대사량과 체력이 탐났다.

치과의사가 우락부락한 근육을 가져서 어디다 쓰겠느냐마는 하체가 튼튼해야 피로가 덜 쌓이고 척추기립근과 광배근이 제대로 받쳐줘야 몸이 굽지 않고 바른 자세로 살 수 있을 테니까.

바른 자세로 살아야 기타 질환이 따라오지 않는 법이다. 조금만 긴장이 풀려도 자세부터 무너지는 탓에 박무현은 자주 목과 등 결림에 시달리곤 했다.

남들만큼 노력하지 않고 남들보다 좋은 근육을 갖고 싶은 건 현대인의 당연한 욕망이지 않을까. 박무현의 시선이 어느새 또 신해량의 가슴과 복근 쪽을 향하고 있었다.

“꾸준히 운동하시면 선생님도 가능합니다.”

“정말 가능합니까?”

“예.”

신해량은 숨도 쉬지 않고 대답했다. 그러나 사물함에서 꺼낸 가방에 옷가지와 짐을 챙겨 넣는 동안 박무현 쪽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질 않았다.

“거짓말이죠?”

박무현이 다시 물었다.

“……예.”

잠깐 말이 없던 신해량에게서 무뚝뚝한 대답이 돌아왔다. 에라이. 이 자식 이럴 줄 알았다. 박무현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얼굴로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신해량이 가방 지퍼를 잠그며 변명했다.

“타고난 골격과 체질은 운동만으로 개선하기 어렵습니다.”

박무현은 거울에 비치는 신해량의 등과 자신의 몸을 무의식적으로 비교하고는 다시 눈앞에 서 있는 신해량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웃었다.

“제가 이제 와서 해량 씨만큼 키가 자라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저도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신해량은 왼쪽 어깨에 더플백을 걸치며 말했다.

“무현 씨는 남들보다 근육이 잘 안 붙는 체질이니 저와 비슷한 수준의 골격근량을 가지기 힘들 거라는 말이었습니다.”

신해량답지 않게 자세하고 친절한 설명이었다. 당황하거나 억울하기라도 한 사람 같아 보이기도 해서 박무현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그마저도 신해량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잘 알아들었습니다. 오늘 일찍 퇴근하시네요?”

박무현은 자연스럽게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 신해량은 보통 영업 마감 시간인 11시까지 체육관을 지켰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화요일 하루만 9시 전에 퇴근하는 모습을 종종 봤었다.

그리고 오늘은 수요일이었으며 시계를 보니 저녁 8시가 막 넘어가고 있었다.

“오늘 지혁이를 보기로 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박무현의 눈이 번뜩 커졌다.

“서지혁 씨요? 그 인간 살아있었어요?”

“예. 살아있습니다.”

신해량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한국에 들어온 겁니까?”

“열흘 전에 입국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연락 한 통 없었다고?”

박무현이 탄식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서지혁이 박무현에게 연락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에게 박무현은 탈출정을 양보한 치과의사 정도에 불과할 테니까.

하지만 이쪽은 서지혁에게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은 입장이었다. 정작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서운한 건 서운한 거다. 이쯤 되면 얼굴 한 번 비출 만도 한데 끝까지 모른 채 살겠다는 거야 뭐야.

박무현의 낯빛이 어두워지자 신해량이 잠시 눈을 굴리며 말을 고르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워낙 제 기분 따라 사는 녀석입니다. 저나 애영이에게도 연락을 자주 하는 녀석이 아니고요.”

“…….”

박무현은 신해량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 그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이르면 다음 달 중으로 일을 시킬 생각입니다. 애영이도 만족해하더군요.”

“일이라니요? 무슨 일이요?”

“체육관에는 아직 일손이 더 필요합니다.”

“아.”

박무현은 그제야 신해량의 말뜻을 이해했다.

“드디어 지혁 씨도 그 위험한 일 관두는 겁니까?”

“예. 그럴 거 같습니다.”

“……그건 참 잘됐네요.”

언젠가 박무현이 느꼈던 예감대로 신해량은 김소원처럼 서지혁을 데려와 일꾼으로 부려먹을 생각인 듯했다. 김소원도 부상 당하기 전까지는 잘나가는 용병이었다고 하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박무현이 눈썹을 찌푸렸다.

김소원이 조그마한 치과에 오게 된 경위는 분명 임무 중 부상을 입고 요양 차원으로 신해량이 보낸 거라고 전해 들었다. 그렇다면 설마…….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지혁 씨 어디 다쳤나요?”

“어깨와 발목이 골절 됐고 허리에는 총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신해량은 그게 정말 대수롭지도 않은 일인 양 말했다. 박무현이 경악스러운 심정으로 되물었다.

“죽을 뻔한 거 아닙니까?”

“죽지 않았습니다.”

그렇겠지. 그러니까 오늘 네가 서지혁을 보러 간다는 거 아니냐. 박무현은 지끈대는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지금은 다 나은 거고요?”

“일상생활에는 지장 없다고 합니다.”

아직 완전히 회복한 건 아닌 모양이다. 그래도 목숨은 붙어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박무현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참 전에 퇴근 준비를 마치고도 제 앞에 덩그러니 서 있는 신해량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약속 있다고 하셨는데 제가 해량 씨를 너무 붙잡아뒀네요. 얼른 퇴근하시죠. 지혁 씨가 기다리겠어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선생님.”

신해량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탈의실을 벗어났다. 신해량이 훌쩍 떠난 자리를 가만 바라보던 박무현은 뒤늦게 옷을 벗고 땀이 식은 몸을 개운하게 씻은 뒤 곧장 집으로 향했다.


* * *


드디어 서지혁까지 오는구나. 잠자리에 들며 박무현은 새삼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옆구리에 자리를 잡고 똬리를 튼 바다의 온기는 따뜻했으며 바닥은 안정감 있게 박무현의 몸을 지탱했고 이불을 푹신하고 부드럽기만 했다. 내심 그리워하던 이들의 안부도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비록 김가영은 해저기지로 다시 돌아가 버렸지만, 끝끝내 얼굴을 비추지 않던 서지혁이 돌아온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퇴근길에 박무현은 이지현한테 문자를 넣어둔 참이었다. 소식이 닿았을까 싶어 물어본 것이었는데 이미 백애영을 통해 전달받았는지 반드시 서지혁을 죽이겠다는 답장이 돌아왔다. 박무현은 실없는 웃음을 속으로 삼키며 눈을 감았다. 어쩐지 좋은 꿈을 꿀 것만 같은, 들뜬 밤이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박무현은 눈을 뜨자마자 기묘하고 불편한 찝찝함에 이불을 확 걷어냈다.

“허.”

믿기지 않은 현실에 헛웃음만 나왔다. 아직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싶어 박무현이 두 눈을 비볐다. 그럴수록 잠은 달아났고 찬물을 끼얹은 참혹한 현실만 피부에 와닿았다.

박무현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축축한 아랫도리가 거슬리다 못해 불쾌하기까지 했다.

부정하고 싶은 현실에 눈을 질끈 감으며 박무현은 샤워기에 물을 틀었다. 스물보다 마흔이 더 가까워진 나이가 됐건만, 이제 와 몽정을 하다니.

연애를 하지 않으니 따로 배출할 욕구가 없기는 했다. 일이 바쁘고 운동까지 하는 탓에 집에 오면 지쳐 뻗어 잠들기 일쑤였다. 혼자 뺄 일도 없었다는 거다. 그런 마음도 딱히 들지 않았었고.

한데, 그 결과가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다.

몽정했다는 사실 자체는 크게 놀랄 일이 아니었다. 오늘 꾸었던 꿈에 비하면 말이다. 몽정을 할 만큼 통상적이고 상식적인, 평범하게 야한 꿈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럼 박무현도 지금처럼 끔찍하고 당혹스러운 기분을 느끼지 않았을 거다.

꿈에는 신해량이 나왔다. 그와 무슨 대단한 짓을 한 것도 아니었다. 신해량은 그냥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어제 박무현이 탈의실에서 보았던 모습 그대로.

그게 전부였다.


* * *


최근 박무현은 신해량이 몹시도 신경 쓰였다. 정확하게는 신해량의 몸이. 아무래도 사흘 전 불미스러운 일이 있기도 했으니 의식하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눈이 신해량의 몸을 스캔하듯 훑어보게 되는 거다. 저 몸이 얼마나 탐났으면 그런 일이 다 벌어졌을까.

박무현은 애써 시선을 돌리며 다시 운동에 집중했다. 하지만 신해량의 몸이 너무 시끄럽고 산만한 탓에 자꾸만 사람의 이목을 잡아끌었다. 탈의실에서 보았던 신해량의 반라가 퍽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그래, 인정한다. 박무현은 신해량의 몸이 부러웠다. 저런 몸을 어떤 남자가 마다할까. 정말 좋을 거다. 온종일 업무를 보아도 피로를 느끼지 못할 테고, 체력도 남아돌아 심적인 여유가 생길지도 모른다.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에 애먹을 일도 없을 터. 뭐가 됐든 지금 몸뚱이보다는 나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상대방의 몸이 부럽고 갖고 싶다 한들 그걸 꿈으로 꾸다 못해 몽정까지 하는 건 이상하지 않나. 덕분에 박무현은 신해량의 얼굴을 보기가 조금 미안해졌다.

문제는 얼굴 보기 껄끄러워 고개를 돌리면 그의 큼직한 몸이 시야에 가득 들어찬다는 거였다. 신해량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쉴 때면 가슴통이 한껏 부풀었다가 가라앉는 진기한 광경을 볼 수도 있었다. 박무현은 땀으로 축축해진 얼굴을 대충 닦아내며 그 모습을 구경하다가 서지혁의 근황을 들었다.

골절됐다던 어깨와 발목의 뼈는 거의 붙었다고 한다. 총상도 총알이 박히거나 한 게 아니라 옆구리를 스친 정도라 했다. 참 다행이었다. 은퇴할 만큼의 심각한 부상도 아닌데 은퇴를 결심한 서지혁이 기특하기도 했다.

“지혁 씨는 언제부터 출근한답니까?”

박무현은 열심히 운동하는 신해량의 몸을 관람하듯 구경하며 물었다.

“조만간 볼 수 있을 겁니다.”

서지혁은 여전히 박무현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신해량이나 백애영도 서지혁을 자주 보는 건 아닌 듯했다. 이지현 또한 아직 서지혁 얼굴을 못 봤다고 하니 조만간 그는 이지현 손에 생을 마감할 거 같다. 박무현은 무조건 이지현의 편을 들어주기로 마음을 굳혔다.


* * *


지난밤에는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새벽까지 이어지던 빗줄기는 출근할 때 즈음이 되어서야 그쳤다.

박무현은 졸린 눈을 비비며 출근길에 올랐다. 요즘 꿈에는 신해량이 나오지 않아서 다행이다,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배수가 제대로 되지 않은 도로에는 커다란 물웅덩이가 생겨있었다. 정말 재수 없게도 박무현이 그 옆을 지나가던 순간, 저 멀리서 심상치 않은 배기음 소리가 들렸다. 박무현이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승용차 하나가 무지막지한 속도로 달려왔다.

거대한 흙탕물 벼락이 박무현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제한속도가 40km/h인 도로에서 희끄무레한 색의 승용차는 못해도 70km/h는 되어 보이는 속도로 내달리더니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뭐야, 저거. 박무현은 얼굴에서 뚝뚝 떨어지는 흙탕물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어이가 없어서 화도 나지 않았다. 아침 출근길에 이게 무슨 날벼락이지? 우연히 박무현의 참상을 목격한 여성 한 명이 걱정스러운 낯으로 다가왔다. 당장 저거 신고해야 하지 않느냐며 대신 화를 내주기도 했다. 박무현은 애써 괜찮다며 손짓하고 돌아섰다. 다행히 치과 건물이 코앞이었다.

집으로 돌아가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기엔 시간이 빠듯했으므로 박무현은 부디 2층의 체육관이 열려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이른 아침이라 거리는 한적했고 건물도 조용했다. 박무현은 흙탕물로 찝찝한 얼굴을 몇 번이고 손바닥으로 훔쳐내며 계단을 올랐다.

2층에 다다른 박무현의 걸음을 멈췄다. 최강격투기체육관 문이 열려있었다. 영업시간보다 1시간이나 이른 시간인데도 불투명한 유리창으로 새어 나온 밝은 빛이 어둑한 복도를 비추고 있었다. 박무현은 곧장 체육관 문을 열었다. 안에는 사람이 한 명뿐이었다.

“해량 씨, 일찍 출근하셨네요.”

맨손으로 덤벨을 들고 몸을 풀던 신해량이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비 오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요.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박무현을 발견한 신해량은 들고 있던 덤벨을 내려놓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예…… 새벽까지 비가 많이 왔었잖아요? 출근하던 길에 지나가던 차가 시원하게 끼얹어줬습니다.”

박무현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간단히 씻을 수 있을까요? 제가 지금 이 꼴을 하고 출근하기가 힘들 거 같습니다.”

“물론이죠. 편히 쓰십시오.”

박무현의 출근길을 어떻게 추측한 건지 신해량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박무현을 탈의실 쪽으로 안내했다. 박무현은 젖은 머리칼을 긁적이며 그 뒤를 따라갔다.

“여분의 옷이 있으니 빌려드리겠습니다.”

“어, 네. 감사합니다.”

신해량은 탈의실 안쪽, 문이 있는지도 몰랐던 곳으로 들어가 회색 티셔츠와 검은색 바지를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언제 챙겨왔는지 모를 수건 하나까지 선반에 올려두고는 미련 없이 탈의실을 떠났다.

박무현은 탈의실 입구를 괜히 몇 번 힐끔거리다가 더러워진 옷을 벗고 샤워 부스로 들어갔다.

샴푸를 짜 머리를 북북 감는 동안, 속도를 전혀 줄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도심 한복판을 아우토반처럼 내달리던 차주를 욕했다. 그러다 체육관에 들어서자마자 보았던 신해량의 놀란 얼굴이 떠올랐다.

신해량은 아침부터 땀을 빼는 중이었는지 머리카락 끝이 젖어 있었다. 옷 위로 드러난 목덜미도 물기로 흥건해 번들거렸다.

박무현을 발견하자마자 한걸음에 달려온 탓인지 바람도 불지 않은 실내에서 그의 짙은 체향이 박무현에게로 훅 끼쳤다. 은근한 땀 냄새가 섞여 있었지만 역하거나 불쾌하지 않았다. 그저 땀에 전 신해량을 보면서 저렇게 부지런해야 저런 몸을 유지할 수 있는 걸까 따위의 생각을 해보았다.

순간 아랫배가 욱신거렸다. 깜짝 놀란 박무현은 얼굴로 흐르는 거품을 급히 문질러 닦아내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중심부는 별다른 이상 없이 잠잠하기만 했다. 갑자기 힘을 받고 있진 않을까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

박무현은 철렁했던 가슴을 쓸어내리며 수전을 끄고 마른 수건으로 머리와 몸을 닦았다. 신해량이 내준 옷은 품이 조금, 아니 많이 크긴 했지만 못 입을 정도는 아니었다. 바지는 최대한 고무줄을 조여 동여맸다.

기장이 넉넉하게 남아도는 탓에 약간의 씁쓸함을 느끼긴 했으나 어쩌랴. 박무현은 눈물을 머금고 바짓단을 접어 올렸다.

“고맙습니다, 해량 씨. 덕분에 무사히 출근합니다.”

탈의실에서 나온 박무현은 봉투에 젖은 옷을 따로 담아 넣고 신해량에게 인사했다.

“다음에 제가 밥 한 끼 사겠습니다.”

“예.”

박무현은 신해량의 배웅을 받으며 체육관을 나와 계단을 올랐다. 아침부터 다사다난한 하루였다.

치과에 들어서니 추레한 박무현의 옷차림을 보고 김소원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나영은 ‘오늘 원장님 옷이 특이하네요. 사이즈를 잘못시켰나 봐요?’ 하고 웃었다.

박무현은 가운이라도 걸쳐 남의 옷을 입은 거 같은 모양새를 가리고자 했다. 그렇게 점심시간이 가까워질 즈음. 김소원이 박무현에게 슬며시 다가와 속삭였다.

“그거 신해량 옷 아니에요?”

마치 어제 집에 안 들어가고 외박한 사람을 쳐다보기라도 하는 눈빛이라 박무현은 아침에 있었던 일을 김소원에게 열심히 설명해야 했다.


* * *


부쩍 비 오는 날이 잦아졌다. 스콜처럼 갑자기 퍼붓다가 그치는 날도 있었으며 하루 내내 얇은 빗방울을 뿌리는 날도 있었다.

오늘은 날씨가 화창하니 맑았다. 일주일에 하루뿐인 휴일을 반드시 집에서만 보내겠다고 결심한 박무현마저 인근 개천에 산책 겸 나갔다 올까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박무현은 집에서 바다와 함께 뒹굴기를 선택했고, 그 선택은 아주 훌륭했다. 해가 저물 때까지도 맑았던 하늘에서 번개가 치더니 삽시간에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박무현은 황급히 열어놓은 창문들을 전부 닫고 자리로 돌아왔다. 얌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던 바다를 두 팔로 꼭 껴안으며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TV에서는 유익하지 않아도 생각 없이 보기엔 충분히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방영 중이었다.

창문을 닫았는데도 빗소리가 살벌했다. 재난 수준으로 퍼붓는 핏줄기에 박무현은 바다를 더욱 끌어안으며 TV 소리를 키웠다.

“바다야, 이게 뭔 일이래? 하늘에 구멍이라도 났나.”

어둑한 창밖을 보며 박무현은 변덕스러운 날씨에 혀를 내둘렀다. 그러든지 말든지 바다는 박무현 품에 안겨 눈을 감고 고롱거렸다.

계획했던 대로 박무현은 더없이 게으르고 나태하며 평화로운 주말을 보내는 중이었다. 집안 가득 쩌렁쩌렁하게 울려퍼지는 초인종 소리만 아니었다면.

깜짝 놀란 바다가 눈을 떴다가 도로 슬라임처럼 흐물거리며 녹아내렸고 박무현만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몸을 일으켰다. 바다가 불편하지 않게끔 조심히 팔을 빼낸 박무현은 인터폰 쪽으로 걸어가며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봤다.

주말 저녁 8시. 이 시간에 박무현을 찾아올 사람은 없었다. 배달 시킨 것도 없었고 택배가 올 것도 없었다.

“어?”

그러나 인터폰 화면에 비친 얼굴을 확인한 박무현은 깜짝 놀라서 허겁지겁 현관으로 달려나갔다.

“해량 씨?”

현관문을 벌컥 열자 복도에는 물에 쫄딱 젖은 신해량이 서 있었다. 그가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갑자기 비가 와서요.”

“일단 들어오세요.”

박무현이 문을 더욱 활짝 열며 신해량에게 들어오라며 턱짓했다. 그가 현관으로 들어섬과 동시에 박무현은 화장실로 달려가 마른 수건 두 개를 들고 왔다. 그리고 꼴이 말도 아닌 신해량의 머리에 수건을 넙죽 얹고 마구 털어댔다.

신해량은 순순히 몸을 숙여 머리를 내어주었다. 뒤늦게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달은 박무현이 멋쩍게 손을 떼며 뒤로 물러났다.

졸지에 머리에 수건이 덜렁 얹어진 신해량은 박무현의 발치를 흘끗 쳐다보다가 허리를 바로 세웠다. 그리고 얼굴과 목덜미에 묻은 물기를 스스로 닦아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근처에 무현 씨 집이 있다는 게 생각나서 찾아왔습니다. 지난번에 빌려드렸던 옷 아직 남아 있습니까?”

“그럼요, 당연히 있죠. 들어오세요.”

신해량은 젖은 꼴로 집 안에 발을 들이기 꺼리는 눈치였다. 보다 못한 박무현이 그의 팔을 잡아끌자 마지 못해 걸음을 옮겼다.

“우선 따뜻한 물로 씻으시고요.”

박무현이 욕실 쪽을 가리키자 신해량은 고분고분 욕실로 향했다. 물에 빠진 사람처럼 홀딱 젖은 처량한 뒷모습을 보니 박무현은 순간 어이가 없었다.

“비가 오는데 우산이 없으면 편의점을 가야지 그 비를 다 맞고 여기까지 왔습니까?”

사납게 쏟아지는 빗줄기는 단순한 폭우 정도가 아니었다. 소리만 들어도 우박이 아닌가 싶을 지경이었다. 근데 그 빗줄기를 다 맞고 왔다니. 어디 멍이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 같았다.

게다가 물에 흠뻑 젖은 모습을 보니 괜히 해저기지 때의 모습이 겹쳐 보여 속이 울렁거렸다.

“편의점보다 선생님 댁이 더 가까웠습니다.”

그러냐. 그렇다면 할 말이 없다.

“옷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박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으로 들어가 따로 개어두었던 신해량의 옷을 가지고 나왔다. 신해량은 문이 열린 욕실 안에 들어가 옷을 벗고 있었다.

젖은 티셔츠를 욕실 바닥에 던져두고 피부에 쫙쫙 달라붙는 바지까지 억지로 벗겨내자 부담스러운 살빛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박무현은 못 볼 거라도 본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해량 씨.”

“예.”

“원래 그렇게 아무 사람 앞에서 옷을 막 벗으십니까?”

그 질문에 신해량은 선뜻 답하지 않고 뜸을 들였다. 이해하기 힘들 질문이었는지, 대답할 말을 적당히 걸러내는 중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박무현은 똑바로 신해량을 보지 못하고 곁눈질로 힐끔대며 욕실 문 앞까지 다가갔다. 옷을 전해주긴 해야 했으니까.

“……같은 남자인데 문제가 됩니까.”

박무현은 욕실 앞에 옷을 두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신해량의 낮은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보기 흉했다면 사과드립니다.”

“아뇨.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니었습니다.”

박무현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물에 젖은 머리칼을 뒤로 쓸어넘긴 멀끔한 얼굴이 박무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욕실 불빛을 등지고 있는데도 그 잘생긴 낯짝과 누군가 공들여 빚은 듯한 조각 같은 몸매에 박무현은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재차 해명했다.

“해량 씨가 사과할 일 아닙니다. 정말 단순히,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물어본 거였습니다.”

여기서 신해량이 사과할 줄은 몰랐다. 잔뜩 당황한 박무현은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횡설수설 떠들었다. 혼자 상대를 의식해서 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인 거냐.

당장 욕실 문을 닫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박무현은 방에서 챙겨온 옷가지를 건넸다.

신해량이 두 손으로 옷을 받아들며 말했다.

“그리고 저에게…….”

평소처럼 무뚝뚝하고 일정한 높낮이의 어조로.

“무현 씨가 아무 사람은 아니니까요.”

욕실 문이 닫혔다. 얇은 문 너머에서 솨아아 울려 퍼지는 물소리가 들렸다.

“…….”

박무현은 후끈 달아오른 얼굴을 손등으로 식히며 허둥지둥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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